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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들의 모음

빈대 잡으려 태워버린 사찰(?)

의정부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동두천으로 향해 가다가 양주군 덕정리에서 56번 지방도로 우회전하여 송우리 방향으로 10여리 달려 고갯길이 시작되는 곳에 '회암사지'라는 표지판을 보게됩니다. 길 좌측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한창 발굴작업중인 회암사지를 만나게되죠.
아래에서 보는 발굴 현장은 마치 대단위 전원주택 공사를 하는 곳처럼 여기저기 흙더미가 쌓여 있고 발굴장소 한쪽에는 발굴과정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한 공간이 임시로 마련되어있기도 하구요.

원래 번성기 때 회암사의 규모는 약 1만여평의 터에 전각이 총 262간, 암자도 17개나 되었으며 15척이나 되는 불상이 7구나 있었고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었다고 하니 엄청나게 큰 사찰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네요. 하긴 지금도 발굴 현장이 엄청나게 넓어 포크레인이 몇 대가 동원되어 있더라구요. 글쎄 포크레인인 유적지 중심부에 들어가 작업을 하면 흙속에 묻힌 유물들은......
그만큼 웅장한 사찰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요.
하여간 이렇게 넓다보니 당간지주 등이 발굴된 아랫부분은 이번에는 흙이 아닌 잡초에 묻혀버리고 있고.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하였다하고, 우왕 2년(1376) 지공화상의 제자인 나옹이 중건하였고,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다시 중창불사한 커다란 사찰이었다네요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전법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으며, 이성계가 공정대왕(숙종 때 정종으로 묘호를 받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여기 회암사에 한동안 머물기도 하였다네요.

그러나 태조 이성계 이후 성종3년(1472)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시켜 중창시켰으나, 당시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부터 회암사는 여러 차례 유생의 상소 대상이 되었답니다. 아무래도 권력의 비호를 받게되면 아무리 똑바른 길을 간다고 해도 나중에 보면 권력의 방향으로 길이 굽어있게 마련이죠.
오죽하면 방방곡곡을 다니는 스님들에게 어느 절에 계시냐고 하면 회암사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하였을까요. 물론 많은 스님들이 있었기도 하겠지만...... 설에 의하면 가마솥 안에 들어가 팥죽을 쑬 만큼 절의 규모가 크고, 공양을 올릴 사람이 너무 많아 쌀을 씻는 함지박이 너무 커서 사람이 빠져 죽어도 모를 정도라고 하였다는군요.

하여간 이렇게 큰 사찰도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보우대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보우대사가 유배지에서 피살되면서 200여년 동안 번성하던 회암사는 빈절이 되어 버렸다는군요. 이때부터 점차 퇴폐해지기 시작하여 어느 때인지 모르게 풍상과 함께 회암사가 없어져 버렸다고 하네요. 또 일설에는 회암사에 빈대가 너무 많아서 빈대를 죽이기 위해 불을 질러 없어졌다기도 하구요.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겠지만요.

이렇듯 위세당당하던 회암사가 폐사되고 난 후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사람이 조대진이란 풍수의 말을 듣고 이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려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대사와 무학대사의 비를 철거하였다가 조정에 알려져 두 사람을 유배시키는 일도 있었다는군요. 그만큼 회암사의 위세가 땅에 떨어져 있었던거죠.

지금은 회암사지 앞길을 지나 산굽이를 돌아가면 또 다른 회암사를 만나게 되는데, "천보산 회암사 대웅전 창건기"에 의하면 순조 때인 1828년에 지금 자리에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조그만 암자를 지어 옛 회암사를 잇게 하고,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가 이후 1977년에 호선대사가 큰 법당을 지어 현재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다는군요.

지금은 발굴 중이라 보우대사의 부도탑으로 추측되는 회암사지 부도탑을 가까이서 볼 수 없지만 발굴 현장 아랫부분인 서편 석단 평지위에 있는 당간지주 등은 자세히 볼 수 있어 그나마 찾아본 보람을 가질 수 있더라구요. 이 당간지주는 3개가 남아있는데 당간지주의 조성연대와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위치에서 좌측 15m 담장 지대석 밑에 쓰러져 매몰되었던 것을 1981년 9월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라는데 원래 짝수로 있어야하는데 1개가 어디 가 있는지 발굴이 안되었답니다. 또 누구네 집 담장이 되어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죠. 하여튼 현재 지주는 좌측의 2기, 우측의 1기가 동서방향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모두 전면에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것으로 지주의 높이는 325㎝이랍니다.

그리고 당간지주에서 동쪽으로 20여 걸음정도 떨어진 곳에는 화강석의 통형 당간주석(괘불지주) 1개가 있답니다. 이 주석은 밑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은 사다리꼴의 지주석으로 안쪽이 비어 있어 깃대를 세울 수 있게 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간이 전시관에는 궁궐터에서나 보이는 靑기와편, "皇帝萬歲"명 기와편, 龍鳳文암수막새 등과 백자들이 전시되어 있어 국찰로서 위세등등했던 사찰의 모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곳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