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원 미륵불......
우리 경상도 민요중에 “성주풀이” 라는 게 있죠.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으로 1절을 시작하여 2절 에는 ‘성주여/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에 제비원의 본이로다......’라고 되는 민요 많이들 들어 보셨을거예요.
본래 ‘성주’라는 것은 민간신앙으로 집집마다 그 집의 부귀영화와 평안을 지켜주는 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성주의 근본지인 안동 땅 제비원에 대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안동에서 아직도 한창 공사중인 5번국도를 따라 영주쪽으로 가면서 첫 번째 고개인 한티재를 넘어서면 확장된 신도로와 구도로가 갈라지면서 200여m 내려가면 구도로 우측 숲속에 있는 커다란 불상을 만나게 됩니다. 보물 제115호인 이천동 석불상, 보통 제비원 마애불, 제비원 미륵불이라고 하죠.
길에서 계단 몇 개 올라서면 연미사(燕尾寺)라는 작은 절이 있고 절을 돌아서면 아주 커다란 2개의 바위가 마주서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약 3m정도 거리를 둔 뒤쪽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답니다. 높이 12.4m라는 이 거대한 석불은 몸은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기고 머리는 다른 돌로 조각하여 얹어 놓은 것으로 몸체를 이루는 자연 암석도 위압적이지만 불두(佛頭)의 꽉 다문 입과 힘이 들어간 눈 그리고 오똑한 코, 밑에서 보면 위압적이며 권위적인 모습이라 평소 보아온 불상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더라구요. 10여미터 아래에서 본 모습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하여간 뭐랄까, 서산 마애삼존불처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머리를 따로 만들어 올린 용미리 석불, 미륵사지 석불들처럼 정형화되지 않고 손가는데로 투박하지만 부드럽게 만들어져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던 민중의 부처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느껴졌답니다.
이 정도면 또 전설따라 삼천리가 나올만 한데 역시 이 마애불에 관한 전설도 두 가지나 있답니다.
하나는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연(燕)이란 처녀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예쁘고 마음씨도 착하고 불심도 깊은 주인공이죠. 이웃 마을에는 김씨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는데 집은 부유하지만 인색하여 남을 도울 줄을 몰랐었답니다. 그런데 이 집 총각이 연이를 사모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는데 염라대왕은 ‘네 죄가 많아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 날 것이로되 건너 마을 연이는 선행(善行)의 창고가 가득하니 좀 빌려 쓰면 살아 돌아 갈 수 있다’고 하여 저승에서 연이의 선행재물을 빌려 다시 살아난 총각은 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기가 가진 재물을 나누어 주었죠. 그러자 착한 이 연이 아가씨 이 재물을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기로 하고 법당을 지었답니다.
그러나 5년이나 걸려 완공 되어 가던 마지막 날 와공(瓦工)이 그만 발을 헛디뎌서 떨어지는 바람에 와공의 몸은 산산 조각이 나고 그의 혼은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하네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절을 제비사 또는 연미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군요. 후일 연이 아가씨가 서른 여덟 살 되어 죽던 날 저녁 천지가 진동하는 듯 한 소리가 나더니 큰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석불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평소 불심이 깊은 연이가 부처님으로로 태어났다면서 사람들은 이 부처를 미륵불로 알고 치성을 드리기 시작하여 성주의 근본이 되었다는구요.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수준의 조각 솜씨를 가진 형제가 있었는데 별로 우애가 깊지 못했던지 서로의 실력에 대해 시기를 한거죠. 그러다가 최고의 자리를 놓고 기간을 정한 후 불상을 만들기로 했답니다. 동생은 열심히 돌을 갈고 다듬었지만 형은 약속한 기일이 다가와도 빈둥빈둥 놀기만 할 뿐 조각을 할 생각을 않았답니다. 그러던중 약속한 날이 되었으나 짧은 일정 탓에 몸통부터 다듬은 동생은 머리부분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빈둥대기만 하던 형은 어느 사이 미륵의 머리부분을 조각하여 기존에 있던 바위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 상태만으로도 위엄서린 훌륭한 미륵불이 되었답니다.
결국 내기에 진 동생은 애통한 마음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고 미완성 불상은 앞 개천에 굴러다니게 되었다네요.(예전에 아래쪽 개울가에 파괴된 불상 머리가 한개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신작로를 닦으면서 어디로옮겼는지 지금은 알지 못한다하구요) 하여간 이런 형제, 남매간의 전설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발견되죠. 성을 누가 빨리 쌓는가, 어딜 빨리 갔다오는가......등등 그런데 꼭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죠. 그것도 형제간에 말입니다.
누가 어떤 연유로 만들었든간에,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천동 석불상은 기존의 바위에 음각으로 몸체를 만들고 그 위에 불두를 조각하여 조성한 것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영가지(永嘉誌, 조선중기에 발간된 안동부 유래 및 문화 생활상을 기록한 책)에는 석불의 조성 연대가 634년(선덕여왕 3년) 연구사(燕口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석불을 덮고 있는 전각은 날아가는 제비 형상을 하고 있었다네요. 그리고 제비원미륵불로 불리워지지만, 오른손을 배에 대고 왼손은 가슴에 대어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짓고 음각된 연화 대좌를 딛고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아미타여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답니다.
또 이 불상이 있는 곳 약200m 앞에 고려 때 설치된 연비원(燕飛院)이라는 관용여관이 있었는데, 제비가 날아가는 쪽에 있는 원이라 하여 연비원이라 하였지만 말할 때는 제비원이라 하였다네요. 그래서 이 불상도 통칭 제비원 석불로 불려지고 있는거죠. 그리고 예전에는 이 제비원 석불이 그려진 제비원 소주가 제조되어 판매된 적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