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식들의 모음
마곡사에서.......
노을진하늘
2002. 2. 21. 07:44
요즘 米國의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나라가 들끓고 있네요. 또 우리나라를 전장화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항상 환란을 당하기만하는 나라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인가 도참서 들은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우선적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 같구요.
오늘은 정감록'이나 '택리지' 등에서도 기근이나 전란의 염려가 없는 삼재팔난불입(三災八難不入)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한 곳인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있는 마곡사에 대해서 적어 볼까합니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공부하던 중 범승으로 화신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었는데, 문수보살이 석가모니의 유물이라면서 가사 한 벌 등을 주면서 본국으로 돌아가 절을 짓고 탑을 세워 그 안에 봉안하라고 하였다네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자장율사가 돌아와 절을 세운 곳은 사실 당시 백제 땅이었거든요. 의자왕(642년) 때 건립을 하였으니, 그리고 그 당시 석가모니의 유물을 안치하라며 탑을 세우라고 하였지만 세웠다는 기록도 없고, 단지 지금 있는 탑은 고려 때 세운 탑이구요.
이런 면에서는 마곡사의 창건 내력은 좀 이상하지 않나 싶답니다.
하여튼 마곡사(麻谷寺)란 이름은 자장율사 절을 짓고나서, 보철화상(普徹和尙)이란 스님이 설법할 때 그 설법을 들으려 몰려드는 사람들이 마치 삼(麻)밭에 삼이 선 것과 같이 골짜기(谷)를 가득 메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네요.
이 마곡사는 특이하게도 사찰 가운데로 태극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답니다. 물의 흐름이 사찰 경내를 반으로 갈라 놓으며 태극 형상으로 흐르고 있고 그 가운데로 극락교라는 다리가 놓여 양쪽을 연결하고 있답니다.
절 입구에서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서 극락교 다리를 건너야 대광보전, 대웅보전을 만날 수 있거든요.
이러한 산과 물이 태극의 형상을 이루고 있어 ‘산 태극, 물 태극’으로 불리워지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환란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는군요.
하지만 이 마곡사가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더라구요. 창건후 거의 200여년을 폐사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임진왜란후에도 60여년을 폐사로 방치 되었었다더군요. 물론 절간이 부서지거나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인적이 끊어진 채 오랜 세월을 지낸 적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란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선택되어진 사람은 아마 김구 선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대광보전앞에 5층의 고려시대 석탑(보물 제799호)이 있는데 그앞에 향나무가 한 그루 서있답니다. 이 나무는 김구 선생이 해방후에 기념 식수를 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답니다. 김구 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민씨 시해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안악군 치하포에서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일본군 특무장교를 처단(미국적인 시각에서 보면 테러) 후 숨어있던 곳이 이 마곡사였었거든요.
또 하나 이 절에서 특이한 것은 바로 다보탑이라고도 불리는 5층 석탑인데, 티벳의 흔적이 남아 있는 탑이라더군요. 물론 티벳의 라마교가 원나라를 통해 고려에 전해지긴 하였지만요. 높이가 8.76미터가 되는 탑의 상륜부에는 풍마동(風磨銅)이라는 둥근 형태의 티벳에서 볼 수 있는 탑 모양이 석탑 위에 얹혀져 있는거죠.
낙산사 원통전 앞에도 풍마동 비슷한 모양의 구조물이 얹혀 있는 탑이 있긴 하지만 마곡사의 5층 석탑은 풍마동 자체가 바로 티벳불교의 탑모양을 축소 시켜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더군요.
그 외 다른 것들은 대부분의 사찰들에서 볼 수 있는 것 들이고, 단지 봄이면 왕벚나무들로 인한 벚꽃이 아름다워서 춘마곡(春麻谷)으로 불리긴하죠.
하여간 지금의 마곡사는 보물로 지정된 대광보전, 대웅보전 등이 초기 건물은 아니고 조선조에 건축된 것이긴 하지만 가람의 배치가 개울과 더불어 예전엔 장엄한 느낌을 주었었거든요.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서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 석탑을 지나 대광보전, 대웅보전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최후의 심판을 받으로 가는 기분이랄까......
더불어 사후 인간을 심판하는 지장보살이 있는 명부전이 다리 건너에 있었더라면 더욱 어울리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었구요....
하지만 지금은 새로 만들어진 극락교 아래 태극천을 막아 비단잉어를 키우느라 물은 오염되어 버려서인가 예전의 그 기분은 느낄 수 없더군요.
오늘은 정감록'이나 '택리지' 등에서도 기근이나 전란의 염려가 없는 삼재팔난불입(三災八難不入)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한 곳인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있는 마곡사에 대해서 적어 볼까합니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공부하던 중 범승으로 화신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었는데, 문수보살이 석가모니의 유물이라면서 가사 한 벌 등을 주면서 본국으로 돌아가 절을 짓고 탑을 세워 그 안에 봉안하라고 하였다네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자장율사가 돌아와 절을 세운 곳은 사실 당시 백제 땅이었거든요. 의자왕(642년) 때 건립을 하였으니, 그리고 그 당시 석가모니의 유물을 안치하라며 탑을 세우라고 하였지만 세웠다는 기록도 없고, 단지 지금 있는 탑은 고려 때 세운 탑이구요.
이런 면에서는 마곡사의 창건 내력은 좀 이상하지 않나 싶답니다.
하여튼 마곡사(麻谷寺)란 이름은 자장율사 절을 짓고나서, 보철화상(普徹和尙)이란 스님이 설법할 때 그 설법을 들으려 몰려드는 사람들이 마치 삼(麻)밭에 삼이 선 것과 같이 골짜기(谷)를 가득 메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네요.
이 마곡사는 특이하게도 사찰 가운데로 태극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답니다. 물의 흐름이 사찰 경내를 반으로 갈라 놓으며 태극 형상으로 흐르고 있고 그 가운데로 극락교라는 다리가 놓여 양쪽을 연결하고 있답니다.
절 입구에서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서 극락교 다리를 건너야 대광보전, 대웅보전을 만날 수 있거든요.
이러한 산과 물이 태극의 형상을 이루고 있어 ‘산 태극, 물 태극’으로 불리워지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환란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는군요.
하지만 이 마곡사가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더라구요. 창건후 거의 200여년을 폐사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임진왜란후에도 60여년을 폐사로 방치 되었었다더군요. 물론 절간이 부서지거나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인적이 끊어진 채 오랜 세월을 지낸 적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란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선택되어진 사람은 아마 김구 선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대광보전앞에 5층의 고려시대 석탑(보물 제799호)이 있는데 그앞에 향나무가 한 그루 서있답니다. 이 나무는 김구 선생이 해방후에 기념 식수를 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답니다. 김구 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민씨 시해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안악군 치하포에서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일본군 특무장교를 처단(미국적인 시각에서 보면 테러) 후 숨어있던 곳이 이 마곡사였었거든요.
또 하나 이 절에서 특이한 것은 바로 다보탑이라고도 불리는 5층 석탑인데, 티벳의 흔적이 남아 있는 탑이라더군요. 물론 티벳의 라마교가 원나라를 통해 고려에 전해지긴 하였지만요. 높이가 8.76미터가 되는 탑의 상륜부에는 풍마동(風磨銅)이라는 둥근 형태의 티벳에서 볼 수 있는 탑 모양이 석탑 위에 얹혀져 있는거죠.
낙산사 원통전 앞에도 풍마동 비슷한 모양의 구조물이 얹혀 있는 탑이 있긴 하지만 마곡사의 5층 석탑은 풍마동 자체가 바로 티벳불교의 탑모양을 축소 시켜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더군요.
그 외 다른 것들은 대부분의 사찰들에서 볼 수 있는 것 들이고, 단지 봄이면 왕벚나무들로 인한 벚꽃이 아름다워서 춘마곡(春麻谷)으로 불리긴하죠.
하여간 지금의 마곡사는 보물로 지정된 대광보전, 대웅보전 등이 초기 건물은 아니고 조선조에 건축된 것이긴 하지만 가람의 배치가 개울과 더불어 예전엔 장엄한 느낌을 주었었거든요.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서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 석탑을 지나 대광보전, 대웅보전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최후의 심판을 받으로 가는 기분이랄까......
더불어 사후 인간을 심판하는 지장보살이 있는 명부전이 다리 건너에 있었더라면 더욱 어울리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었구요....
하지만 지금은 새로 만들어진 극락교 아래 태극천을 막아 비단잉어를 키우느라 물은 오염되어 버려서인가 예전의 그 기분은 느낄 수 없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