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식들의 모음
신문에서 살곶이다리 축제기사를 보고
노을진하늘
1999. 10. 10. 19:19
10월 9일자 신문마다 전날 있었던 태조 이성계의 사냥행차라면서 살곶이 다리를 건너는 축제의 한 장면이 사진기사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살곶이 다리는 태조가 건축한 다리가 아니라 태종(이방원)이 후에 건축한 다리이다. 원래 살곶이 다리가 있던(현재 중랑천 하류 한양대부근) 이곳은 살곶이 벌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이방원의 왕권쟁탈에 분노한 이성계가 함흥 別宮에서 돌아오지 않자 상왕인 아버지 이성계를 회유(?)하기 위하여 태종이 수차례에 걸쳐 함흥에 差使를 보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보낸 차사들이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였고(함흥차사라는 말이 이때 생겨남) 마지막으로 차사 박순에 의해 이성계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 온다고 통보가 오자 이상하게 생각한 태종은 현재의 살곶이 벌에 마중을 나가면서 기둥이 굵은 차일(현재의 파라솔 종류) 세우게 하였다. 한양으로 돌아오던 이성계는 이곳에서 마중나온 태종을 향해 분에 못이겨 화살을 날렸으나 세워두었던 차일뒤로 몸을 피하였고 화살은 차일 기둥에 박혔다. 이때부터 이곳을 화살이 박힌 곳, 즉 살곶이 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살곶이 다리는 태종이 후에 경기도 광주 大母山(또는 대무산, 현재 서울 강남구 헌릉로 옆에 있는 곳)에 자신의 능(헌릉)을 만들기 위하여 자주 행차를 하면서 현재의 살곶이 다리(箭串橋)를 건축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