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식들의 모음
횃불이 되어버린 화석정
노을진하늘
2002. 8. 22. 20:34
서울에서 자유로를 따라 한참을 달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라는 곳에 이르면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자유로 왕복 4차선의 넓은 길에서 빠져나와 아주 작은 산길(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가는 길이지만 그곳에 서면 임진강과 좌측으로 임진나루를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 특히 학생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이랍니다.
지금의 화석정은 1966년에 다시 세워지긴 하였지만 화석정은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몸을 불사르곤 하였다네요.
고려말 대유학자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의 유지(遺址)로서 야은 선생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삼은(三隱)이라 하였잖아요. 그런데 조선이 개국되자 길재선생은 조선 정종이 제수한 태상박사(太常博士)라는 자리를 불사이군이란 명목으로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화석정터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교하향교 훈도를 지냈었다네요. 그후 그자리에 율곡선생의 5대조인 이명신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창건하고 이숙함이 화석정으로 이름을 지었다 하고 후에 율곡 이이가 중수한 유서깊은 정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화석정도 임진란 당시 불에 타버리고 마는데......
1952년 5월 30일 선조가 왜군의 진격을 피해 돈의문(서대문)을 나서 북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죠. 당시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왔었던 모양인데 그 빗속에 임금의 행차가 벽제역을 지나 혜음령을 넘어 임진강가에 이르렀답니다. 그런데 그 빗속에 임금을 따르는 신하들도 하나 둘 사라져 버리고 얼마 안되는 신하들과 군사들만이 선조 주위에 있었답니다.
하여간 임진강에 도착한 그날 밤 파주목사가 저녁 수라상을 임금에게 올리기 위해 상을 보던중 하루 종일 굶주리고 있었던 군사들이 부엌에 차려놓은 음식들을 슬쩍 먹어버린거죠. 배가 고프니까...... 이 사실을 알게된 파주목사는 그길로 줄행랑.
거기다가 임금이 도망간다니까 어디로 가냐고 민초들은 길을 막고 아우성을 벌이고 신하들과 군사들은 대부분 도망가고 비는 오고. 야단난거죠. 강은 건너야겠는데.....
이때 수행하던 도승지 이항복이 한가지 생각을 했답니다. 예전에 율곡선생이 화석정에서 제자들을 지도할 당시 제자들과 더불어 정자 기둥에 들기름을 칠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였던 것을 기억해내고 임진 나루 위에 있는 정자에 사람을 보내 불을 지르게 한거죠.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속이지만 기름을 가득품고 있던 정자의 기둥들은 정자 아래 강물을 환하게 비추어 주고 선조를 모신 행렬은 무사히 강을 건넜답니다.
1593년 10월 선조가 서울로 돌아올 때 이 강에 당도하여 천우신조로 이 나루를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였다하여 예전에 신지강(神智江)이라 불리우던 강이 그때부터 임진강(臨津江)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며 이때 화석정도 선조의 특별 하사금으로 복구가 되었었다네요. 그러다가 6.25 한국동란 당시 소실된 것을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1966년 다시 복원한거구요. 그래서인가 지금은 기름을 가득 먹은 정자는 아니더라구요. 그리고 다른 유명한 정자들이 그러하듯이 화석정이라는 현판은 당시 대통령의 친필이라네요.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가면 자운서원(紫雲書院)이라는 곳이 있답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사라졌던 서원인데 율곡선생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후에 효종으로부터 자운이라는 사액을 받은 서원이랍니다.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되어 있는데, 사당은 6칸으로 팔작지붕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솟을 대문 형식의 삼문 좌측으로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구요.
또 이 서원 우측으로 율곡선생의 부모를 비롯하여 율곡선생 내외 형님 내외 등 가족묘가 형성되어 있더군요. 물론 율곡선생의 부모인 신사임당 여사(?)의 묘도 있구요.
그런데 좀 흉물스러운 것은 서원과 가족묘 아래에는 경기도 청소년 수련관인가 하는 건물과 물이 썩어 버린 것 같은 연못, 그리고 왠지 부자연 스러운 정원 등이 있어 조화롭지 못한 것 같더라구요. 순전히 제 생각.
사진중에 위에 있는 것은 화석정, 아래는 자운서원


지금의 화석정은 1966년에 다시 세워지긴 하였지만 화석정은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몸을 불사르곤 하였다네요.
고려말 대유학자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의 유지(遺址)로서 야은 선생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삼은(三隱)이라 하였잖아요. 그런데 조선이 개국되자 길재선생은 조선 정종이 제수한 태상박사(太常博士)라는 자리를 불사이군이란 명목으로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화석정터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교하향교 훈도를 지냈었다네요. 그후 그자리에 율곡선생의 5대조인 이명신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창건하고 이숙함이 화석정으로 이름을 지었다 하고 후에 율곡 이이가 중수한 유서깊은 정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화석정도 임진란 당시 불에 타버리고 마는데......
1952년 5월 30일 선조가 왜군의 진격을 피해 돈의문(서대문)을 나서 북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죠. 당시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왔었던 모양인데 그 빗속에 임금의 행차가 벽제역을 지나 혜음령을 넘어 임진강가에 이르렀답니다. 그런데 그 빗속에 임금을 따르는 신하들도 하나 둘 사라져 버리고 얼마 안되는 신하들과 군사들만이 선조 주위에 있었답니다.
하여간 임진강에 도착한 그날 밤 파주목사가 저녁 수라상을 임금에게 올리기 위해 상을 보던중 하루 종일 굶주리고 있었던 군사들이 부엌에 차려놓은 음식들을 슬쩍 먹어버린거죠. 배가 고프니까...... 이 사실을 알게된 파주목사는 그길로 줄행랑.
거기다가 임금이 도망간다니까 어디로 가냐고 민초들은 길을 막고 아우성을 벌이고 신하들과 군사들은 대부분 도망가고 비는 오고. 야단난거죠. 강은 건너야겠는데.....
이때 수행하던 도승지 이항복이 한가지 생각을 했답니다. 예전에 율곡선생이 화석정에서 제자들을 지도할 당시 제자들과 더불어 정자 기둥에 들기름을 칠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였던 것을 기억해내고 임진 나루 위에 있는 정자에 사람을 보내 불을 지르게 한거죠.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속이지만 기름을 가득품고 있던 정자의 기둥들은 정자 아래 강물을 환하게 비추어 주고 선조를 모신 행렬은 무사히 강을 건넜답니다.
1593년 10월 선조가 서울로 돌아올 때 이 강에 당도하여 천우신조로 이 나루를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였다하여 예전에 신지강(神智江)이라 불리우던 강이 그때부터 임진강(臨津江)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며 이때 화석정도 선조의 특별 하사금으로 복구가 되었었다네요. 그러다가 6.25 한국동란 당시 소실된 것을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1966년 다시 복원한거구요. 그래서인가 지금은 기름을 가득 먹은 정자는 아니더라구요. 그리고 다른 유명한 정자들이 그러하듯이 화석정이라는 현판은 당시 대통령의 친필이라네요.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가면 자운서원(紫雲書院)이라는 곳이 있답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사라졌던 서원인데 율곡선생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후에 효종으로부터 자운이라는 사액을 받은 서원이랍니다.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되어 있는데, 사당은 6칸으로 팔작지붕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솟을 대문 형식의 삼문 좌측으로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구요.
또 이 서원 우측으로 율곡선생의 부모를 비롯하여 율곡선생 내외 형님 내외 등 가족묘가 형성되어 있더군요. 물론 율곡선생의 부모인 신사임당 여사(?)의 묘도 있구요.
그런데 좀 흉물스러운 것은 서원과 가족묘 아래에는 경기도 청소년 수련관인가 하는 건물과 물이 썩어 버린 것 같은 연못, 그리고 왠지 부자연 스러운 정원 등이 있어 조화롭지 못한 것 같더라구요. 순전히 제 생각.
사진중에 위에 있는 것은 화석정, 아래는 자운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