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식들의 모음
약소국의 비애, 삼전도비
노을진하늘
2000. 10. 9. 08:14
삼전도의 굴욕이란 말을 아시죠?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인조가 마지막으로 남한산성에서 한달 보름을 버티다가 청나라 태종의 주둔지이던 삼전도(삼밭 나루)에서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당하며 항복하던 치욕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랍니다.
현재 이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삼전도비가 예전의 위치는 아니지만 사적 101호로 지정되어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남아 있답니다.
원래 삼전도비란 명칭은 삼밭 나루에 있었다고 명칭이 붙은 것이고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하는데, 인조 17년(1637) 12월 청나라에서 패전국의 임금인 인조가 청태종에게 한 맹서를 인조가 항복하면서 고개를 조아린 삼밭 나루에 비석을 만들어 남기라고 요구를 하여 청나라 태종의 공덕비를 세우게 되었다네요.
그후 청일전쟁 후인 고종 32년(1895)에 이 비를 치욕이라며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시대인 1913년에 일본이 조선이 평소 다른 나라들에게 예속되어 왔다는 것을 입증한다며 다시 세워 놓았던 것을 1945년 8월 광복후 지역주민들이 다시 땅속에 묻어 버렸답니다. 그러다가 1963년 대홍수로 비석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민족 역사의 일부분으로 상징성을 두고자 문교부에서 원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가 송파대로를 확장하면서 현위치에 세우게 되었다는데, 비석의 높이는 4.6m 폭이 1.4m로 대부분의 우리나라 비석들이 그렇듯이 거북의 등에 비석이 놓여 있더군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비석의 비문은 3종류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전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글자로 20행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몽고문자 20행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 한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답니다.
그리고 그 위치도 송파대로 뒷 골목 주택가에 자그마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비석옆 공터는 삼전도비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를 아이들이 놀이터가 되었답니다.
이 비석의 비문은 당시 한성판윤이던 오준이 쓴 것으로 어쩔 수 없이 비문을 쓴 것을 한탄하여 벼슬을 내놓고 붓을 꺽어(절필) 버리고는 다시는 글씨를 쓰지 않겠다고 우측손을 돌로 찍어 병신을 만들면서 자학과 자책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겠죠? 하지만 얼마전에 타계한 종교계의 지도자(?)라는 인사는 80년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집전하면서 온갖 미사려구와 찬사를 사용하여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찬양하더니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계속 종교계의 지도자로 이름을 날리더군요.(당시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아는데......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러면 오준의 예 처럼 남들 앞에는 나서지 말아야죠.)
글의 내용이 다른 곳으로 흘러 갔네요. 그리고 비문 끝에 오준 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비문을 지은 이경석의 이름도 있었다는데 아마도 후손들이 그랬는지 경석이라는 부분은 깍여 있다는데, 이경석은 당시 이조판서로 김상헌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던 인물로 효종때 영의정에 올라 북벌정책을 보좌한 사람으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그 묘가 있답니다.(삼전도비는 비석 옆에 철책이 둘러져 있어 몰래 안에 들어가 보기 전에는 비문이 잘 보이질 않는답니다.)
사실 병자호란은 청이 약소국인 조선을 침공한 것이지만, 광해군을 몰아 낸 인조반정이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광해군은 지금의 중국땅 북방에서 명과 여진족(넓게 보면 우리 민족임)이 세운 후금(청)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실리외교를 추구하였답니다. 국세가 기울어져 가는 명에서 후금을 치는데 군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자,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군사 1만명을 보내면서도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내 후금과 싸우지 말고 상황을 보아 유리한 쪽에 붙어 전력을 보존하라고 지시를 하여, 강홍립은 후금과 싸우는 체 하다가 항복하고 자의로 조선이 이 전쟁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고 설명후 강홍립은 후금의 전세와 내부사정을 광해군에게 밀서로 보고하는 등 하였다네요.
그러다가 '부모의 관계인 명을 등지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명분으로 인조반정의 주세력들이 광해군을 폐위하면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더군다나 인조반정의 공신이던 이괄이 난을 일으킨 후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고하면서 병자호란을 유발하게 된거죠.
물론 광해군이 친형인 임해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모한 사건 등은 패륜이라고 볼 수 있으나 정파간의 싸움에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며(조선조 대부분 왕의 형제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유랑생활을 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가 많았음), 명을 등진 이유도 선왕인 선조가 임진란 당시 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명에서 왜군의 침입을 초래하는 선봉이 된다고 선조임금의 입국을 막았던 사실들에서, 광해군은 명나라도 믿을 것이 못되며 실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약소국이 살아 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인데.......
그것 보다도 인조반정의 실질적인 이유는 대동법을 실시하여 기존의 권신세력인 서인의 몰락을 예고하게 되자,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명분으로 삼았던 거죠. 결국 반정이 임진란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또다시 황폐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답니다.
현재 이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삼전도비가 예전의 위치는 아니지만 사적 101호로 지정되어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남아 있답니다.
원래 삼전도비란 명칭은 삼밭 나루에 있었다고 명칭이 붙은 것이고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하는데, 인조 17년(1637) 12월 청나라에서 패전국의 임금인 인조가 청태종에게 한 맹서를 인조가 항복하면서 고개를 조아린 삼밭 나루에 비석을 만들어 남기라고 요구를 하여 청나라 태종의 공덕비를 세우게 되었다네요.
그후 청일전쟁 후인 고종 32년(1895)에 이 비를 치욕이라며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시대인 1913년에 일본이 조선이 평소 다른 나라들에게 예속되어 왔다는 것을 입증한다며 다시 세워 놓았던 것을 1945년 8월 광복후 지역주민들이 다시 땅속에 묻어 버렸답니다. 그러다가 1963년 대홍수로 비석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민족 역사의 일부분으로 상징성을 두고자 문교부에서 원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가 송파대로를 확장하면서 현위치에 세우게 되었다는데, 비석의 높이는 4.6m 폭이 1.4m로 대부분의 우리나라 비석들이 그렇듯이 거북의 등에 비석이 놓여 있더군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비석의 비문은 3종류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전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글자로 20행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몽고문자 20행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 한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답니다.
그리고 그 위치도 송파대로 뒷 골목 주택가에 자그마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비석옆 공터는 삼전도비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를 아이들이 놀이터가 되었답니다.
이 비석의 비문은 당시 한성판윤이던 오준이 쓴 것으로 어쩔 수 없이 비문을 쓴 것을 한탄하여 벼슬을 내놓고 붓을 꺽어(절필) 버리고는 다시는 글씨를 쓰지 않겠다고 우측손을 돌로 찍어 병신을 만들면서 자학과 자책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겠죠? 하지만 얼마전에 타계한 종교계의 지도자(?)라는 인사는 80년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집전하면서 온갖 미사려구와 찬사를 사용하여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찬양하더니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계속 종교계의 지도자로 이름을 날리더군요.(당시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아는데......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러면 오준의 예 처럼 남들 앞에는 나서지 말아야죠.)
글의 내용이 다른 곳으로 흘러 갔네요. 그리고 비문 끝에 오준 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비문을 지은 이경석의 이름도 있었다는데 아마도 후손들이 그랬는지 경석이라는 부분은 깍여 있다는데, 이경석은 당시 이조판서로 김상헌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던 인물로 효종때 영의정에 올라 북벌정책을 보좌한 사람으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그 묘가 있답니다.(삼전도비는 비석 옆에 철책이 둘러져 있어 몰래 안에 들어가 보기 전에는 비문이 잘 보이질 않는답니다.)
사실 병자호란은 청이 약소국인 조선을 침공한 것이지만, 광해군을 몰아 낸 인조반정이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광해군은 지금의 중국땅 북방에서 명과 여진족(넓게 보면 우리 민족임)이 세운 후금(청)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실리외교를 추구하였답니다. 국세가 기울어져 가는 명에서 후금을 치는데 군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자,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군사 1만명을 보내면서도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내 후금과 싸우지 말고 상황을 보아 유리한 쪽에 붙어 전력을 보존하라고 지시를 하여, 강홍립은 후금과 싸우는 체 하다가 항복하고 자의로 조선이 이 전쟁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고 설명후 강홍립은 후금의 전세와 내부사정을 광해군에게 밀서로 보고하는 등 하였다네요.
그러다가 '부모의 관계인 명을 등지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명분으로 인조반정의 주세력들이 광해군을 폐위하면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더군다나 인조반정의 공신이던 이괄이 난을 일으킨 후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고하면서 병자호란을 유발하게 된거죠.
물론 광해군이 친형인 임해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모한 사건 등은 패륜이라고 볼 수 있으나 정파간의 싸움에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며(조선조 대부분 왕의 형제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유랑생활을 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가 많았음), 명을 등진 이유도 선왕인 선조가 임진란 당시 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명에서 왜군의 침입을 초래하는 선봉이 된다고 선조임금의 입국을 막았던 사실들에서, 광해군은 명나라도 믿을 것이 못되며 실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약소국이 살아 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인데.......
그것 보다도 인조반정의 실질적인 이유는 대동법을 실시하여 기존의 권신세력인 서인의 몰락을 예고하게 되자,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명분으로 삼았던 거죠. 결국 반정이 임진란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또다시 황폐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