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식들의 모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는 적성산성과 단양신라적성비
노을진하늘
2003. 10. 13. 16:21
대구에서 춘천까지 이어진 중앙고속도로상에서 쉽게 산성에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소개할까 합니다. 중앙고속도로 대구에서 춘천방향(하행선)으로 달리다 보면 현재 기차 터널을 제외한 터널중 가장 긴 죽령터널(4,600m)을 지나 단양 휴게소가 나오거든요. 휴게소가 놓은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 오면 아주 좋은 것을 구경할 수 있답니다.
적성산성과 신라 진흥왕의 단양적성비를 만날 수 있는 곳이죠. 적성산성은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뒷산인 성재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전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충주부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린 곳 중에 한곳으로 인근에 있는 온달산성, 죽령산성 등과 더불어 죽령고개를 넘은 신라의 한강상류 공략의 거점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하네요.
특히 장수왕이 475년에서 492년 사이 한반도 남방진출을 도모하면서 충주지역을 국원성(國原城, 나라의 근원이 된다는 뜻)으로 칭하고 지금의 충주댐 하류지역에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를 세우면서 남방진출의 전진기지로 사용하며 죽령을 넘으려고 노력을 했었죠. 하지만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6세기 중엽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을 하면서 죽령을 넘어 적성산성을 기점으로 한강하류를 넘보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곳 출신으로 공이 많은 '야이차'의 공덕을 기리는 신라 적성비(국보 198호, 545년-550년경)를 이곳 적성산성에 세우게 되었다네요. 물론 진흥왕 순수비 만큼의 가치를 논할 수는 없지만 고구려땅이던 이곳이 신라의 땅이다라는 척경비로서 이곳의 백성을 선무하고자 세운 것이랍니다.
이 신라 적성비는 약 1m도 못되는 높이로 단양 적성산성에 비각과 함께 세워져 있지만 원래 1978년 땅속에 30cm정도 묻힌 채로 단국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는군요. 하여간 신라는 이후 충주지역을 국원소경이라 부르며 많은 귀족 자제들을 옮겨 살게 하는 등 한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키워 나가게 되었죠. 후에 고구려 영양왕(7세기 초) 때 온달장군이 죽령과 계립령 이북의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것도 바로 충주 단양지역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구요. 내용이 자꾸 충주쪽으로 흘러가려고 하네요..(^^)
하여간 중앙고속도로 하행선 단양휴게소에 도착하면 휴게소 뒷편으로 산성이 보이거든요.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세워진 산성이지만 죽령을 넘어 한강을 건너는 첫 번째 산언덕에 세워진 것으로 밑에 흐르는 남한강에서 보면 절벽위에 세워진 천험의 요새인 셈이죠. 차를 세워두고 산보하는 마음으로 휴게소 뒷길을 걸어 올라가면 무너져 버린 성벽과 신라적성비을 만날 수 있고, 또 동쪽으로 따라가면 복원된 성벽을 만날 수 있구요. 성둘레가 900여미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신라의 성곽과 비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네요.
사실 예전에 성아래 강건너편을 다니는 중앙선 열차를 자주 이용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전혀 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거든요....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성벽의 모습이 강건너에서도 뚜렷이 볼 수 있게 복원되었고, 이제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답니다.
더군다나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휴게소에는 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발견된 고인돌, 그리고 고려시대 무덤의 모습이 그래도 재현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상, 하행선 단양휴게소를 들리면 좋은 역사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적성산성과 신라 진흥왕의 단양적성비를 만날 수 있는 곳이죠. 적성산성은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뒷산인 성재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전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충주부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린 곳 중에 한곳으로 인근에 있는 온달산성, 죽령산성 등과 더불어 죽령고개를 넘은 신라의 한강상류 공략의 거점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하네요.
특히 장수왕이 475년에서 492년 사이 한반도 남방진출을 도모하면서 충주지역을 국원성(國原城, 나라의 근원이 된다는 뜻)으로 칭하고 지금의 충주댐 하류지역에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를 세우면서 남방진출의 전진기지로 사용하며 죽령을 넘으려고 노력을 했었죠. 하지만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6세기 중엽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을 하면서 죽령을 넘어 적성산성을 기점으로 한강하류를 넘보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곳 출신으로 공이 많은 '야이차'의 공덕을 기리는 신라 적성비(국보 198호, 545년-550년경)를 이곳 적성산성에 세우게 되었다네요. 물론 진흥왕 순수비 만큼의 가치를 논할 수는 없지만 고구려땅이던 이곳이 신라의 땅이다라는 척경비로서 이곳의 백성을 선무하고자 세운 것이랍니다.
이 신라 적성비는 약 1m도 못되는 높이로 단양 적성산성에 비각과 함께 세워져 있지만 원래 1978년 땅속에 30cm정도 묻힌 채로 단국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는군요. 하여간 신라는 이후 충주지역을 국원소경이라 부르며 많은 귀족 자제들을 옮겨 살게 하는 등 한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키워 나가게 되었죠. 후에 고구려 영양왕(7세기 초) 때 온달장군이 죽령과 계립령 이북의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것도 바로 충주 단양지역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구요. 내용이 자꾸 충주쪽으로 흘러가려고 하네요..(^^)
하여간 중앙고속도로 하행선 단양휴게소에 도착하면 휴게소 뒷편으로 산성이 보이거든요.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세워진 산성이지만 죽령을 넘어 한강을 건너는 첫 번째 산언덕에 세워진 것으로 밑에 흐르는 남한강에서 보면 절벽위에 세워진 천험의 요새인 셈이죠. 차를 세워두고 산보하는 마음으로 휴게소 뒷길을 걸어 올라가면 무너져 버린 성벽과 신라적성비을 만날 수 있고, 또 동쪽으로 따라가면 복원된 성벽을 만날 수 있구요. 성둘레가 900여미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신라의 성곽과 비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네요.
사실 예전에 성아래 강건너편을 다니는 중앙선 열차를 자주 이용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전혀 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거든요....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성벽의 모습이 강건너에서도 뚜렷이 볼 수 있게 복원되었고, 이제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답니다.
더군다나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휴게소에는 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발견된 고인돌, 그리고 고려시대 무덤의 모습이 그래도 재현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상, 하행선 단양휴게소를 들리면 좋은 역사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