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식들의 모음

갑사를 다시 세운 소, 공우탑

노을진하늘 2001. 10. 15. 07:23
가을이 점점 깊어가요. 이럴 때는 잠시 여유를 부려 단풍놀이를 가는 것도 좋은 생각이죠. 물론 생각만요. 아무래도 행동으로 옮기기엔 아직.....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유명한 곳이 몇 군데 있지만 계룡산 갑사 가는 길도 유명한 곳의 하나랍니다. 지금은 갑사 가는 길이 깨끗이 포장되어 있고 길가에 유명한 공주 밤을 구워파는 아주머니들이 가득하지만, 예전에는 계곡에 흐르는 물과, 그 옆의 오솔길이 참으로 운치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갑사를 지나 금잔디고개를 넘어 남매탑, 동학사로 가는 길은 초보자라도
쉽게 오를 수 있는 등산 코스구요.

이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 1년)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노력으로 유명해지면서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 자리를 하게 되었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된 것을 후에 다시 재건한 것이죠.
갑사에 가보면 현재 대웅전이 있는 쪽과 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건너 대적전이 있는데, 현재 대적전이 있는 자리는 원래 계룡갑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대적전 앞의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이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부도와 그 옆 너른 땅에 남아있는 대형 초석들이 웅장했던 사찰의 규모를 상상하게 해주고 있답니다.
그리고 대적전 앞마당에 놓여 있는 이 부도는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참 아름답다는 느낌, 설명하면 도리어 조잡해 보일 것 같구요. 하여간 통일신라시대 기법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물 제 257호로 지정된 것 인데, 본래 대웅전 뒷산인 수정봉 중턱 중사자암터에 있던 것을 윤덕영이란 사람이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갑사 대웅전 쪽에서 옆에 있는 계곡의 다리를 건너 대적전으로 가다보면 다리를 건너자 마자 이끼가 가득 낀, 아무런 감흥도 못느끼는 석탑이 하나 있어요. 앞에 공우탑이라는 표지가 있는데 여기에도 또 전설따라 삼천리가 붙어 있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이 끝난 후 스님들이 폐허가 된 절을 찾아 다시 모여들자, 왜란중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절을 지킨 인호, 경순, 성안, 병윤 스님은 갑사를 다시 중창하기로 하고 모두 탁발에 나섰답니다.

동쪽으로 길을 떠난 인호 스님이 해질 녁 어느 산아래 이르자 절박한 소 울음소리를 들려 왔다네요. 그래서 스님이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자, 고삐가 소나무에 칭칭 감긴 어미 소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고 옆에는 송가지 한 마리가 어미소의 고통을 아는 듯 안타까워 울부짖으며 소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었더랍니다.
그것을 보고 스님은 소의 고삐를 잘라서 소를 구해 주고 다시 길을 재촉하길 7년, 네 분 스님들이 모은 시주금을 갖고 대웅전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 가기 시작하였으나 문제는 돈. 그렇다고 공사를 그만두고 다시 시주에 나설 수도 없고 스님들은 암담했겠죠.

그러던 어느 날 밤, 인호 스님은 꿈에 소 한 마리가 절 안으로 들어오더랍니다. 아직 공사중이라 인부들이 못 들어오게 막았느나, 소는 막무가내로 들어와 인호 스님 앞에 멈춰 서더니, 소가 말을 한거죠.
"스님,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저는 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이렇게 왔사옵니다. 법당 건립 불사를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절 밖으로 사라진거죠. 꿈에서 깬 인호 스님은 꿈이 하도 생생해서 다시 꿈속의 소를 생각하더니, "아! 바로 그 소로구나" 생각하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문밖에 나섰더니 소 한 마리가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 소는 스님을 쳐다보고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3일 후 서까래를 한 마차 싣고 왔다네요, 또 3일 후에는 기와를 가득 싣고 오고, 하여간 소의 도움으로 대웅전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제 마지막으로 법당 마루만 깔면 불사는 완공을 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마지막으로 법당 마루를 깔기 위해 스님들이 백두산과 울릉도로 향나무를 구하러 떠났답니다. 백두산에 도착한 스님들은 향나무를 구하긴 했으나 운반할 일이 걱정,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그 소가 나타나 향나무를 자신의 등에 얹으라고 하더니 어느새 절에 옮겨 놓고는 이번에는 울릉도에 나타나 향나무를 등에 지고 바다를 헤엄쳐 건너더랍니다. 하여간 소들은 대단하죠.(소띠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여러 차례 바다를 오가며 향나무를 운반하던 소는 결국 지쳤는지 입가에 흰 거품이 일기 시작하였지만, 그 덕분에 필요한 향나무들이 마련되고 법당 마루는 은은한 향내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향나무 운반을 마치고 지쳐 쓰러진 소는 일어나질 못하였다네요. 하여간 법당 불사가 완공되던 날, 네 분의 스님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소에게로 다가가자, 소는 큰 눈을 껌벅이며 스님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제 할일을 다 했다는 듯 스르르 눈을 감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더군요. 이에 스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소의 무덤(어디 있는지는 ?)을 잘 만들어준 후 부처님께 왕생극락을 빌었죠.
그리고 스님들은 절 입구에 소의 공을 칭송하는 3층탑을 세우고 "공우탑"이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 탑도 앞에 말한 부도와 같이 윤덕영이란 사람이 지금의 장소에 옮겨 놓은 것이라네요.

윤덕영이란 사람은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삼촌으로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형인데, 경술국치 때 조카인 순정효황후의 치마폭에 감추어 둔 옥새를 빼았아 찍은 사람으로, 아내 김복원은 일제의 전쟁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여성단체인 애국금차회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운동에 앞장을 선 여자죠. 우리도 지난 번 외환 위기에 금모으기 운동을 한 적이 있지만요.
그리고 윤치영, 윤치호 모두 한 집안들이고 후에 대통령을 지낸 모씨도 이 집안이죠.
하여간 윤덕영이 자신의 권력을 믿고 갑사에 자신의 별장을 세우고 사찰을 별장 앞마당쯤으로 생각하여 석탑, 부도, 약사여래입상들을 옮겨 놓고 감상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참 월악산에 있는 덕주사 마애불 근처에도 조성연대가 불분명한 우공탑이라는 탑이 있답니다. 마애불있는 자리는 윗절, 지금의 덕주사는 아랫절이라고 불렀다는데 지금은 없어진 윗절을 중창할 당시 어디선가 소 한 마리가 재목을 싣고 나타나 마애불 밑 멈추었다네요. 그래서 그곳에 법당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소는 재목을 다 실어주고는 쓰러져 죽었는데, 그 소가 죽은 자리에 탑을 세우고 소의 뼈를 보관한 것이 이 우공탑이라는군요.

여담 한마디 하면 마애불 우측에 있는 바위옆에는 더덕이 많이 자라고 있답니다. 그냥 한뿌리 캐어 내려오면서 맑은 계곡물에 씻어, 입구에 있는 동동주 집에서 동동주와 같이 먹으면 맛이 일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