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식들의 모음
정동에 있다는 이유로 사라진 사찰.
노을진하늘
2001. 11. 13. 12:05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정동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죠? 조선조에 서울을 기준으로 정동에 있는 포구라 하여 정동진이라 하였으나, 요즘은 정확한 계측에 의하여 서울의 경복궁을 기준으로 볼 때 조금 북쪽인 안인진이 정동이라고 강릉시에서는 주장을 하고 있죠.
하여간 서울을 기준으로 정동이 어디냐 라는 것보다 동해바다라는 그 자체가 마음을 설레이게 하곤 하죠. 그냥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그런데 정동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어버린 절이 있었답니다. 강릉에서 7번국도를 따라 정동진으로 내려가다 보면 안인진을 거쳐, 몇 년전에 그물에 걸려 포획된 북한 잠수함이 전시되어 있는 곳을 지나면 정동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길 오른편으로 넓다란 주차장이 완비된 사찰을 보게 됩니다.
등명낙가사로 1956년 경덕스님에 의해서 창건된 사찰로 절 입구에 있는 일주문 중앙에 정동을 표시하는 나침반이 어른 허리정도 오는 대리석 기둥을 받침으로 설치되어 있더군요.
원래 이곳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수다사(水多寺)라는 사찰이 있었죠. 자장율사는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절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건립하고 절을 창건하였다더군요. 지금은 등명낙가사 경내에 보물로 지정된 1기의 오층석탑 밖에 볼 수 없지만 원래는 3기의 석탑을 세웠는데 한국전쟁에서 함포사격을 받아 1기가 사라지고, 또 1기는 수다사 앞 바다 속에 세운 수중탑(水中塔)이라 볼 수 없는거죠. 바닷속 어딘지도 알려지지 않았고요.
하여간 이 수다사는 신라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고려초에 중창을 하면서 등명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고 마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답니다.
조선조 억불 정책의 하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등명사가 위치한 곳이 한양의 궁궐에서 正東에 해당하기에 임금이 계신 궁궐에서 받아야 할 일출의 상서로운 빛을 부처님을 모신 사찰에서 먼저 받아들이기에 나라의 기운이 빠진다는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폐사를 시켰다는군요.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원래 이 절이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임진왜란때 왜병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는 설도 있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역시 조선 왕실과 관련이 있는데, 언제 때인지는 몰라도 당시 임금이 안질이 심하여 점술가에게 물었더니, 동해 정동에 있는 큰절의 쌀 씻은 물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서 용왕을 놀라게 하여 임금이 안질에 걸렸다고 하였다네요. 그래서 임금의 특사가 동해 원산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쌀 뜬물이 나오는 곳을 찾던중 정동에 와서 보니 점술가의 말과 같았기에 등명사를 폐사로 만들었다고도 하구요.
하여간 지금의 등명낙가사 앞 언덕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정동진에서 보는 바다보다 훨씬 아름답고 신선하게 보이는 것 같더라구요. 하지만 요즘 중창불사를 하는 대부분의 사찰들이 그렇듯이 정형화된 가람의 모습이 아쉽기도 하구요. 또 하나 사족을 달자면 밤이면 거의 서울의 환락가와 구별할 수 없는 정도인 정동진의 모습에서 어쩌면 매일 떠오르는 동해의 장엄한 태양이, 밤새 밝힌 네온사인 불빛에 휩쓸려 그 기운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고요.
그동안 컴퓨터을 몇가지 손보느라 글을 못올려서 독자님들께 죄송스럽네요.
가을이 저만치 가고 있지만 아직은 가을의 여운을 늦게나마 느껴보고 싶구요. 항상 건강하시길 바라며.
하여간 서울을 기준으로 정동이 어디냐 라는 것보다 동해바다라는 그 자체가 마음을 설레이게 하곤 하죠. 그냥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그런데 정동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어버린 절이 있었답니다. 강릉에서 7번국도를 따라 정동진으로 내려가다 보면 안인진을 거쳐, 몇 년전에 그물에 걸려 포획된 북한 잠수함이 전시되어 있는 곳을 지나면 정동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길 오른편으로 넓다란 주차장이 완비된 사찰을 보게 됩니다.
등명낙가사로 1956년 경덕스님에 의해서 창건된 사찰로 절 입구에 있는 일주문 중앙에 정동을 표시하는 나침반이 어른 허리정도 오는 대리석 기둥을 받침으로 설치되어 있더군요.
원래 이곳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수다사(水多寺)라는 사찰이 있었죠. 자장율사는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절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건립하고 절을 창건하였다더군요. 지금은 등명낙가사 경내에 보물로 지정된 1기의 오층석탑 밖에 볼 수 없지만 원래는 3기의 석탑을 세웠는데 한국전쟁에서 함포사격을 받아 1기가 사라지고, 또 1기는 수다사 앞 바다 속에 세운 수중탑(水中塔)이라 볼 수 없는거죠. 바닷속 어딘지도 알려지지 않았고요.
하여간 이 수다사는 신라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고려초에 중창을 하면서 등명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고 마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답니다.
조선조 억불 정책의 하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등명사가 위치한 곳이 한양의 궁궐에서 正東에 해당하기에 임금이 계신 궁궐에서 받아야 할 일출의 상서로운 빛을 부처님을 모신 사찰에서 먼저 받아들이기에 나라의 기운이 빠진다는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폐사를 시켰다는군요.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원래 이 절이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임진왜란때 왜병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는 설도 있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역시 조선 왕실과 관련이 있는데, 언제 때인지는 몰라도 당시 임금이 안질이 심하여 점술가에게 물었더니, 동해 정동에 있는 큰절의 쌀 씻은 물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서 용왕을 놀라게 하여 임금이 안질에 걸렸다고 하였다네요. 그래서 임금의 특사가 동해 원산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쌀 뜬물이 나오는 곳을 찾던중 정동에 와서 보니 점술가의 말과 같았기에 등명사를 폐사로 만들었다고도 하구요.
하여간 지금의 등명낙가사 앞 언덕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정동진에서 보는 바다보다 훨씬 아름답고 신선하게 보이는 것 같더라구요. 하지만 요즘 중창불사를 하는 대부분의 사찰들이 그렇듯이 정형화된 가람의 모습이 아쉽기도 하구요. 또 하나 사족을 달자면 밤이면 거의 서울의 환락가와 구별할 수 없는 정도인 정동진의 모습에서 어쩌면 매일 떠오르는 동해의 장엄한 태양이, 밤새 밝힌 네온사인 불빛에 휩쓸려 그 기운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고요.
그동안 컴퓨터을 몇가지 손보느라 글을 못올려서 독자님들께 죄송스럽네요.
가을이 저만치 가고 있지만 아직은 가을의 여운을 늦게나마 느껴보고 싶구요. 항상 건강하시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