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을 따라 지도를 보다보면 강변을 끼고 절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풍수지리학적으로 산세와 물 그리고 사찰과의 관계에서 절이 그런곳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겼을지도 모르지만, 남한강변의 사찰들은 대부분 나루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조선시대 조운의 중요한 수단은 배를 이용한 한양까지의 운송이었다. 따라서 조운의 운송과정에서 중간 기착지 또는 한양가는 길목에서 물을 건너는 곳인 나루터야 말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빈약한 재정의 나라에서 이러한 나루를 지키는데 군대를 주둔시킬 수도 없었기에 이런 곳에 사찰(그것도 대형 사찰)을 건립하여 승려들로 하여금 나루터의 유지 및 보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찰로 섬강(원주시소재)에서 부터 보면 흥법사지, 고달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 등을 들 수 있고 현존하는 신륵사(여주) 또한 그런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또한 나루터변에 작은 산성을 쌓아 유사시를 대비한 곳도 있는데 여주 이포나루(지금의 이포대교 밑) 변의 파사성도 그런 역할을 하던 곳이다.
사실 우리역사(한반도 안)에 보면 강에 작은 가교를 놓는 일은 자주있어도 튼튼한 다리를 놓은 적은 역사적으로 드물다. 도성밖에 놓인 다리로서 튼튼한 다리는 아마도 중랑천의 전곶교(살곶이다리)가 최초의 돌다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왜구, 또는 오랑캐(당,송,명,청의 표현이고 우리 부여족의 일원인 여진, 말갈, 거란을 뜻함)의 침입으로 인한 도성의 함락을 막고자, 서울 오는 곳의 중요한 길목에는 다리를 건설치 않고 장마철을 제외한 일년정도 사용하는 가교를 건설하거나, 배를 이용하여 도강을 하였다. 이러한 다리형태는 지금도 낙동강 상류지방에 많이 존재하는데 다음 기회에 적어 볼까나.
또한 나루터변에 작은 산성을 쌓아 유사시를 대비한 곳도 있는데 여주 이포나루(지금의 이포대교 밑) 변의 파사성도 그런 역할을 하던 곳이다.
사실 우리역사(한반도 안)에 보면 강에 작은 가교를 놓는 일은 자주있어도 튼튼한 다리를 놓은 적은 역사적으로 드물다. 도성밖에 놓인 다리로서 튼튼한 다리는 아마도 중랑천의 전곶교(살곶이다리)가 최초의 돌다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왜구, 또는 오랑캐(당,송,명,청의 표현이고 우리 부여족의 일원인 여진, 말갈, 거란을 뜻함)의 침입으로 인한 도성의 함락을 막고자, 서울 오는 곳의 중요한 길목에는 다리를 건설치 않고 장마철을 제외한 일년정도 사용하는 가교를 건설하거나, 배를 이용하여 도강을 하였다. 이러한 다리형태는 지금도 낙동강 상류지방에 많이 존재하는데 다음 기회에 적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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