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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들의 모음

곰과 사람의 사랑이 담긴 곰나루

우리나라에 있던 나라들 중에 아마 백제만큼 수도를 자주 옮긴 나라도 없을 것 같네요. 한성백제로부터 시작하여 웅진시대, 사비시대, 그리고 무왕은 김제지역으로 옮길 계획을 갖고 있었다니까요. 오늘은 웅진시대의 수도였었던 충남 공주에 가볼까 하네요.

참 먼저 지난 번 올렸던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하였던 배론 성지의 지명에 대해서 잠깐 말씀 드릴까 합니다. 배론은 한자로 주론(舟論)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골짜기가 배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배론골짜기라고 하거든요. 사실 가보면 길다란 모양이긴 하지만, 글쎄요? 배모양이라고 특정짓기에는...... 아마도 풍수지리상의 모양이 아닐런지요. 충북 청주도 예전에는 시내 모양이 배와 같은 모양이라고 하여 시내 중심부(예전의 청주극장 앞)에 돛대의 역할을 하는 당간을 세우기도 하였었죠. 그리고 청주의 옛 이름을 주성(舟城)이라고 하기도 하였고.

각설하고 공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령왕릉, 공산성, 계룡산, 동학사 등등이 있죠.
그중에서도 무령왕릉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이 무령왕릉 앞 주차장과 공주공설운동장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한 800m 정도 금강변으로 내려가게 되면 곰나루터라는 관광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대전에서 공주로 오는 길과 나란히 흐르던 금강물이 일제시대 세워진 금강다리를 지나고 나면서 급격히 왼쪽으로 방향을 꺽으면서 흐르게 되는데 바로 강물이 꺽이는 지점에 곰나루라는 나루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곰나루라는 명칭이 붙게 된 이유는 나루터 건너편에 있었던 산(공주에서 칠갑산으로 가는 국도변)에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암컷 곰 한 마리가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물론 남자죠)를 납치하여 자신의 동굴속에 가두어 두고, 몇 년을 살게 되었죠. 그사이에 두 사람(?) 사이에 두명의 자식도 생기게 되었답니다. 평소 식량을 구하러 암컷 곰이 밖에 나갈 때에는 동굴입구를 막아 놓곤 하였으나, 자식들이 생기자 하루는 '설마 도망가랴' 생각하고 그냥 밖으로 나갔었으나, 그 설마가 사람을 잡은 것이 아니라 곰을 잡았답니다. 암컷 곰이 돌아와 보니 어부는 벌써 강을 건너 반대편에 다다르고 있었고, 곰은 두 자식과 함께 울고 불고 애원을 했으나 끝이었죠. 결국은 자식들과 같이 강물속으로 투신 자살을 하는 비극을 연출하였답니다.

하여튼 이러한 연유로 곰나루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고, 그 이후로 이곳에서는 물고기도 잡히지 않고 흉년이 드는 등 하여 결국에는 마을 사람들이 곰나루터 근처에 곰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네요. 그런데 암컷 곰이 언제 있었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그냥 전설이니까요. 공주를 원래 웅진이라고 하였었죠. 웅진(熊津), 바로 곰나루란 뜻이죠. 옛말에 곰을 '고마' 또는 '구마'라고도 하는데 백제와 연관이 많은 일본에는 지금도 '구마'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지명이 있답니다. 무령왕의 조상인 '곤지왕' 역시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랍니다.
글이 복잡해지네요. 이런 것은 본업으로 하는 학자들 몫이고, 하여간 곰의 전설이 얽힌 곰나루도 지금은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어 겉보기에는 좋아지고 있더군요.

하지만 몇 년전에 이곳에 온천수가 나온다고 온천 개발을 하고, 지금은 부도가 나서 공사가 중단된 콘도 건물이 덩그러니 서있고, 또 물에 빠져 죽은 곰의 시체를 찾는지 강바닥의 모래는 산더미처럼 파내어 팔아 먹다가 업자와 공무원이 같이 구속되는 등 난장판이 된 곳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