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압구정동에 일이 있어 갔었답니다. 모 백화점에 갔더니 입이 딱!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가 않군요. 하여간 압구정동이 유명한 이유는 아시죠? 특히 젊은 분들은.
오늘은 압구정동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죠. 예전에 종묘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임금이 죽으면 정전에 임금의 위패를 모시면서 더불어 그 임금의 측근에서 보좌하던 신하 3인의 위패를 공신당에 모신다는 말씀을 드렸었죠. 그런데 세조가 죽고난 후 세조의 공신으로 종묘의 공신당에 위패가 봉안된 한명회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마 다들 아실겁니다. 이 한명회의 호가 압구정이고, 또 현재 압구정동 산 310-3(동호대교와 성수대교 사이 한강으로 돌출한 낮은 언덕)에 압구정(狎鷗亭)이란 정자를 지은데서 압구정동이란 유래가 시작되었답니다.
하지만 그전에도 압구정이 있었죠. 송나라때 한충헌이란 사람이 황제를 새로 들여 세우고도 자신은 초야에 묻혀 살면서 장강(양자강)가에 날아 다니는 갈매기와 친하다는 뜻으로 집을 압구정이라 하였다는데, 아무튼 한충헌의 압구정이 시조인 것 같네요.
그런데 초야에 묻혀 살던 한충헌과 달리 현실정치에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던 한명회가 한충헌이 세운 정자를 본받았다는데 문제가 있답니다.
사실 한명회하면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등을 죽이고 1등 정난공신이었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 우승지, 도승지 등을 거쳐 1466년(세조 12년)에 영의정이 된 사람이죠. 특히 예종, 성종 두임금의 국구(장인)이며 1468년 세조가 죽자 임금권한대행인 '원상'이 되어 예종, 성종임금 때까지 세도를 누리던 인물이랍니다.
이런 사람이 송나라 한충헌의 압구정을 모방하여 명나라 학사인 '예겸'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호도 압구정으로 바꾸고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도 짓게 되었던 거죠. 하지만 이 압구정은 초가도 아니고 호화롭기 그지없었는데, 궁궐에서나 쓰는 용봉무늬 브라인드를 사용하는 등 한마디로 끝내주게 지었던 모양입니다.
이 정자가 얼마나 호화로웠는지는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압구정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기를 간청하는 등 하여 조정에서도 말들이 많았다네요. 당시에는 일개 개인이 사신을 영접할 수 없었지만 사신들이 원하면 안해줄 수도 없었던거죠. 그래서인가 조선조 한양의 명소로 國都八景에 압구범주(狎鷗泛舟, 압구정 앞 한강 뱃놀이)가 소개될 정도였었다네요.
사실 명나라 사신들이라고 하면 조선 조정에 커다란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한충헌과 달리 한명회는 현실 정치에 개입하게 되고 자신의 영역을 확대 시켜 나가게 된거죠. 꼭 요즘의 누구 같기도 하죠. 은퇴하면 그 수준에 맞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한명회의 압구정에 대한 폐해이 심해지자 성종은 왕명으로 정자를 헐어 버리게 되었답니다. 오죽했으면 임금이 장인어른의 정자를 부수라고 했겠습니까.
하여튼 남들보다 조금 일찍 태어난 한명회가 73세까지 살았다던데, 그때까지도 현실정치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압구정(狎鷗亭)의 압(狎)을 압(押)으로 바꿔 압구정(押鷗亭, 갈매기를 눌러 쫓아 버린다는 뜻)으로 불렀을까요? 하여튼 압구정이란 정자가 세워진 후 근처 한강변에 날아들던 갈매기도 날아들지 않았다는데 아마도 한명회란 사람의 속마음을 새들도 알았기 때문이겠죠.
이런 점에서 보면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황희 정승의 반구정(伴鷗亭, 갈매기와 친구라는 뜻)이 생각납니다. 황희 정승에 대해서 요즘 들어서 그렇게 청렴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가 파주소재 임진강가에 지은 정자에서 그의 노년 생활의 청빈함을 엿볼 수 있다고 하네요. 사실 저도 반구정엔 가보지 못했지만 근간에 한번 가볼 생각이랍니다.
하여간 이 압구정도 지금은 아파트 단지에 파묻혀 빈터만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몇년전에 서울시에서 정도 600년 기념사업으로 압구정을 복원한다고 하기도 하였으나, 정자 자체가 주는 의미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서인가 소식이 없답니다.
오늘은 압구정동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죠. 예전에 종묘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임금이 죽으면 정전에 임금의 위패를 모시면서 더불어 그 임금의 측근에서 보좌하던 신하 3인의 위패를 공신당에 모신다는 말씀을 드렸었죠. 그런데 세조가 죽고난 후 세조의 공신으로 종묘의 공신당에 위패가 봉안된 한명회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마 다들 아실겁니다. 이 한명회의 호가 압구정이고, 또 현재 압구정동 산 310-3(동호대교와 성수대교 사이 한강으로 돌출한 낮은 언덕)에 압구정(狎鷗亭)이란 정자를 지은데서 압구정동이란 유래가 시작되었답니다.
하지만 그전에도 압구정이 있었죠. 송나라때 한충헌이란 사람이 황제를 새로 들여 세우고도 자신은 초야에 묻혀 살면서 장강(양자강)가에 날아 다니는 갈매기와 친하다는 뜻으로 집을 압구정이라 하였다는데, 아무튼 한충헌의 압구정이 시조인 것 같네요.
그런데 초야에 묻혀 살던 한충헌과 달리 현실정치에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던 한명회가 한충헌이 세운 정자를 본받았다는데 문제가 있답니다.
사실 한명회하면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등을 죽이고 1등 정난공신이었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 우승지, 도승지 등을 거쳐 1466년(세조 12년)에 영의정이 된 사람이죠. 특히 예종, 성종 두임금의 국구(장인)이며 1468년 세조가 죽자 임금권한대행인 '원상'이 되어 예종, 성종임금 때까지 세도를 누리던 인물이랍니다.
이런 사람이 송나라 한충헌의 압구정을 모방하여 명나라 학사인 '예겸'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호도 압구정으로 바꾸고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도 짓게 되었던 거죠. 하지만 이 압구정은 초가도 아니고 호화롭기 그지없었는데, 궁궐에서나 쓰는 용봉무늬 브라인드를 사용하는 등 한마디로 끝내주게 지었던 모양입니다.
이 정자가 얼마나 호화로웠는지는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압구정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기를 간청하는 등 하여 조정에서도 말들이 많았다네요. 당시에는 일개 개인이 사신을 영접할 수 없었지만 사신들이 원하면 안해줄 수도 없었던거죠. 그래서인가 조선조 한양의 명소로 國都八景에 압구범주(狎鷗泛舟, 압구정 앞 한강 뱃놀이)가 소개될 정도였었다네요.
사실 명나라 사신들이라고 하면 조선 조정에 커다란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한충헌과 달리 한명회는 현실 정치에 개입하게 되고 자신의 영역을 확대 시켜 나가게 된거죠. 꼭 요즘의 누구 같기도 하죠. 은퇴하면 그 수준에 맞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한명회의 압구정에 대한 폐해이 심해지자 성종은 왕명으로 정자를 헐어 버리게 되었답니다. 오죽했으면 임금이 장인어른의 정자를 부수라고 했겠습니까.
하여튼 남들보다 조금 일찍 태어난 한명회가 73세까지 살았다던데, 그때까지도 현실정치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압구정(狎鷗亭)의 압(狎)을 압(押)으로 바꿔 압구정(押鷗亭, 갈매기를 눌러 쫓아 버린다는 뜻)으로 불렀을까요? 하여튼 압구정이란 정자가 세워진 후 근처 한강변에 날아들던 갈매기도 날아들지 않았다는데 아마도 한명회란 사람의 속마음을 새들도 알았기 때문이겠죠.
이런 점에서 보면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황희 정승의 반구정(伴鷗亭, 갈매기와 친구라는 뜻)이 생각납니다. 황희 정승에 대해서 요즘 들어서 그렇게 청렴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가 파주소재 임진강가에 지은 정자에서 그의 노년 생활의 청빈함을 엿볼 수 있다고 하네요. 사실 저도 반구정엔 가보지 못했지만 근간에 한번 가볼 생각이랍니다.
하여간 이 압구정도 지금은 아파트 단지에 파묻혀 빈터만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몇년전에 서울시에서 정도 600년 기념사업으로 압구정을 복원한다고 하기도 하였으나, 정자 자체가 주는 의미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서인가 소식이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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