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해미읍에 가면 해미읍성이라는 유명한 성이 있죠.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 해미IC를 통해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곳이구요. 더구나 천주교 순교성지로 유명한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랍니다.
이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 성종 22년(1491년)에 축조된 면적 5만9천평의 석성(石城)으로 둘레 약 1.8㎞, 높이 4m에 동문, 서문, 남문 등 3개의 문이 있답니다.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외적(특히 왜구)의 침입이 심한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읍성들이 축성되었는데 해미읍성도 그중의 하나로 인근의 홍주성, 서산읍성, 태안읍성, 면천읍성 등이 비슷한 시기에 축성되었으며, 특히 화약병기의 발달로 기존의 대표적 방어시설이 산성에서 읍성으로 옮겨지게 되죠... 그러나 험악한 산간 지형을 이용한 산성보다는 평지에 축성된 읍성은 아무래도 방어력이 떨어지게 되어 이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옹성, 해자 등의 건설이 의무화 되기도 하였는데, 사실 이러한 읍성들은 적은 수의 왜구들을 방어하고 물리치는데는 효과적이었다고 하지만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대규모의 공격에는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오히려 몇몇 산성들만이 방어에 성공하게 되죠... 물론 산성이라고 다 방어에 성공한 것도 아니고 읍성의 성격인 진주성은 오히려 대승을 거두기도 하지만요.
하여튼 해미읍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진남문(南門)은 화강석 홍예문으로 문을 들어와 고개를 돌려 머리위에 있는 문루 대석을 보면 "皇明 弘治 四年 辛亥 造"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명나라 연호 홍치 4년(신해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표식으로 1491년에 준공했다는 준공표식으로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에 올라 성안을 둘러보면 거의 6만평이라는 성 모습이 얼마되지 않는 돈으로도 살 수 있을 것 같이 작게 느껴지더라구요. 물론 사적이라 개인에게 팔리는 없겠지만........
그리고 현존하는 다른 읍성들과 마찬가지로 산성(山城)이나 행성(行城, 長城)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몸을 감추고 활 등을 쏠 수 있는 여장(女墻, 타첩)이 없으며 진남문과 서문 사이에 바닷가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향해 포를 쏠 수 있는 포루가 2곳에 치성(雉城)의 형태로 위치하고 있답니다. 원래 해미읍성이 준공되기 전에는 여장도 있었고, 문도 4곳에 있었으나 후에 북문이 없어지는 등 조선초 태종때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사영이 이곳으로 옮기면서 시작된 읍성의 원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모양이더군요. 하기야... 성안에 있는 객사도 예전에는 학교로 쓰이고 면사무소가 있었다더군요......
하여간 진남문에서 바라보면 커다란 고목이 한그루 보이는데 거의 400년 가량된 회화나무(호야나무)로 둘레에 철제담장을 두루고 또 4방향으로 이 회화나무의 어린 자손들이 자라고 있는데, 조선말 병인년(1866년)에 대원군은 덕산에 위치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독일인 옵페르트가 도굴하려다 실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 많은 천주교인을 이 회화나무에 묶어 고문을 하였다네요.
특히 지금은 부러져 없지만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 사람을 철사줄로 묶어 놓고 활을 쏘아 대기도 하였다니.. 끔찍하죠... 하지만 이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는데 잠시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 회화나무 앞에 충청도 각지에서 끌려온 천주교도들을 가두어 두었던 감옥이 있던 자리가 있는데. 감옥 터로 보아 아주 작은 감옥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직업이 그쪽이다 보니 유관순 열사가 처음 수감되었던 예전의 공주감옥 보다도 아주 작지 않았을까 싶더라구요... 그렇게 작은 곳에 많은 사람들을 가두었다니. 어떻게 지냈을까 싶구요. 하지만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10년을 살다가 옥사하였다니. 글쎄요 요즘 교도소처럼 방마다 TV가 있고 따뜻한 온돌에 여름에는 더울까봐 선풍기, 수시로 목욕할 수 있는 곳도 아닌데 아무튼 사람사는 곳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인가 발길을 돌려 호서좌영(湖西左營) 관아 앞에 있는 고욤나무 열매를 먹었더니 유난히 떫어 뱉어 버리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 벌어진 곳을 해미라는 곳에 도착하면 만날 수 있는데, 작은 소읍이라 낮은 건물들만 있는 해미읍에서 가장 웅장해 보이는 건물을 멀리서도 볼 수 있는데 바로 해미천변에 건립된 천주교 해미성지 순교기념관과 기념탑이 있는 곳으로, 충청도 각지에서 끌려온 천주교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회화나무에 매달아 고문을 하다가 읍성 서문밖에 있는 돌다리에 천주교 聖物을 놓아두고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안그러면 그대로 쳐죽여 버리는 등 하던중 1868년에는 워낙 천주교도들이 죽기를 각오하자 아예 해미천변에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하였는데 그 수가 일천이 넘었다고 하니.....
그런 까닭인가 그곳에 세워진 순교기념관은 경건한 모습보다는 무섭다는 생각(아마 들판위에 웅장하게 세워져있어 그럴지도 모르지만)이 먼저 떠오르네요.
이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 성종 22년(1491년)에 축조된 면적 5만9천평의 석성(石城)으로 둘레 약 1.8㎞, 높이 4m에 동문, 서문, 남문 등 3개의 문이 있답니다.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외적(특히 왜구)의 침입이 심한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읍성들이 축성되었는데 해미읍성도 그중의 하나로 인근의 홍주성, 서산읍성, 태안읍성, 면천읍성 등이 비슷한 시기에 축성되었으며, 특히 화약병기의 발달로 기존의 대표적 방어시설이 산성에서 읍성으로 옮겨지게 되죠... 그러나 험악한 산간 지형을 이용한 산성보다는 평지에 축성된 읍성은 아무래도 방어력이 떨어지게 되어 이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옹성, 해자 등의 건설이 의무화 되기도 하였는데, 사실 이러한 읍성들은 적은 수의 왜구들을 방어하고 물리치는데는 효과적이었다고 하지만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대규모의 공격에는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오히려 몇몇 산성들만이 방어에 성공하게 되죠... 물론 산성이라고 다 방어에 성공한 것도 아니고 읍성의 성격인 진주성은 오히려 대승을 거두기도 하지만요.
하여튼 해미읍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진남문(南門)은 화강석 홍예문으로 문을 들어와 고개를 돌려 머리위에 있는 문루 대석을 보면 "皇明 弘治 四年 辛亥 造"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명나라 연호 홍치 4년(신해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표식으로 1491년에 준공했다는 준공표식으로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에 올라 성안을 둘러보면 거의 6만평이라는 성 모습이 얼마되지 않는 돈으로도 살 수 있을 것 같이 작게 느껴지더라구요. 물론 사적이라 개인에게 팔리는 없겠지만........
그리고 현존하는 다른 읍성들과 마찬가지로 산성(山城)이나 행성(行城, 長城)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몸을 감추고 활 등을 쏠 수 있는 여장(女墻, 타첩)이 없으며 진남문과 서문 사이에 바닷가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향해 포를 쏠 수 있는 포루가 2곳에 치성(雉城)의 형태로 위치하고 있답니다. 원래 해미읍성이 준공되기 전에는 여장도 있었고, 문도 4곳에 있었으나 후에 북문이 없어지는 등 조선초 태종때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사영이 이곳으로 옮기면서 시작된 읍성의 원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모양이더군요. 하기야... 성안에 있는 객사도 예전에는 학교로 쓰이고 면사무소가 있었다더군요......
하여간 진남문에서 바라보면 커다란 고목이 한그루 보이는데 거의 400년 가량된 회화나무(호야나무)로 둘레에 철제담장을 두루고 또 4방향으로 이 회화나무의 어린 자손들이 자라고 있는데, 조선말 병인년(1866년)에 대원군은 덕산에 위치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독일인 옵페르트가 도굴하려다 실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 많은 천주교인을 이 회화나무에 묶어 고문을 하였다네요.
특히 지금은 부러져 없지만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 사람을 철사줄로 묶어 놓고 활을 쏘아 대기도 하였다니.. 끔찍하죠... 하지만 이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는데 잠시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 회화나무 앞에 충청도 각지에서 끌려온 천주교도들을 가두어 두었던 감옥이 있던 자리가 있는데. 감옥 터로 보아 아주 작은 감옥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직업이 그쪽이다 보니 유관순 열사가 처음 수감되었던 예전의 공주감옥 보다도 아주 작지 않았을까 싶더라구요... 그렇게 작은 곳에 많은 사람들을 가두었다니. 어떻게 지냈을까 싶구요. 하지만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10년을 살다가 옥사하였다니. 글쎄요 요즘 교도소처럼 방마다 TV가 있고 따뜻한 온돌에 여름에는 더울까봐 선풍기, 수시로 목욕할 수 있는 곳도 아닌데 아무튼 사람사는 곳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인가 발길을 돌려 호서좌영(湖西左營) 관아 앞에 있는 고욤나무 열매를 먹었더니 유난히 떫어 뱉어 버리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 벌어진 곳을 해미라는 곳에 도착하면 만날 수 있는데, 작은 소읍이라 낮은 건물들만 있는 해미읍에서 가장 웅장해 보이는 건물을 멀리서도 볼 수 있는데 바로 해미천변에 건립된 천주교 해미성지 순교기념관과 기념탑이 있는 곳으로, 충청도 각지에서 끌려온 천주교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회화나무에 매달아 고문을 하다가 읍성 서문밖에 있는 돌다리에 천주교 聖物을 놓아두고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안그러면 그대로 쳐죽여 버리는 등 하던중 1868년에는 워낙 천주교도들이 죽기를 각오하자 아예 해미천변에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하였는데 그 수가 일천이 넘었다고 하니.....
그런 까닭인가 그곳에 세워진 순교기념관은 경건한 모습보다는 무섭다는 생각(아마 들판위에 웅장하게 세워져있어 그럴지도 모르지만)이 먼저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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