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강변북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자유로를 거쳐 임진각에 이르게 되죠. 한강하류의 강변을 따라 가는 길이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곳이죠. 특히 두 가지 모습을 보이는 젊은 사람들에게서 슬픔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승용차에 연인을 태우고 달리고 있고, 한쪽에는 자유로 강변을 따라 설치된 철책을 지키는 젊은 군인들의 모습.
이 자유로를 따라 임진각을 향해 가다보면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반구정이란 곳을 지나게 된답니다.
예전에 압구정에 대한 글을 쓰면서 반구정에 대해서 언급을 했었는데, 이 반구정(伴鷗亭)은 말그대로 갈매기를 동무 삼은 정자인데 조선초 유명한 정승인 황희(黃喜:1363∼1452)가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보낸 곳이랍니다.
원래 이름은 반구정이 아닌 낙하진(낙하나루) 근처에 있어서 낙하정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임진강 물결을 바라보면서 갈매기들의 천국이기에 후에 반구정이라고 하였다네요.
이 반구정 아래에서 보면 반구정의 왼쪽에 앙지대(仰止臺)라는 육각정이 있는데, 이 앙지대 자리가 원래 반구정 자리랍니다. 1915년 일제 때 반구정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그 자리에 앙지대라는 이름의 정자를 세운거죠. 이 앙지대로 6.25때 소실된 것을 1967년엔가 다시 세운 것이랍니다. 그래서인가 정자안에는 파주군수님들의 이름이 씌여진 편액들이 즐비하네요.
하여튼 이 두 개의 정자 아래에서 보면 앙지대는 육각정, 반구정은 사각정자, 그리고 앙지대가 반구정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앙지대를 반구정으로 착각하기 쉽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 반구정 옆에 있는 방촌 영당은 1452년 89세의 나이로 황희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유림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을 짓고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며 제사를 지내는 곳이랍니다.
황희선생과 관련된 정자가 또 하나있죠. 예전에 말씀 드렸었는데 광한루(광통루)가 바로 황희 선생이 태종때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여 파직, 서인(庶人)으로 되어 파주 교하를 거쳐 남원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지은 정자랍니다.
사실 조선초에 유명한 정승을 꼽으라면 아마 이 황희 선생과 맹사성을 들 수가 있거든요.
두 사람다 고려 말부터 벼슬길에 올라 역성혁명에 의한 조선 개국후에도 관직에 머물면서 정승을 지내신 분들인데 나이는 맹사성이 3살 많다네요.
그런데 맹사성과 달리 황희 선생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소재 광덕산에 있는 두문동이라는 곳에 은거 하였다가 태조 이성계와 친구들의 간청으로 벼슬길에 다시 오른 사람이랍니다.
하여간 황희 선생은 벼슬길에 오르면서 목숨을 건졌으나, 고려의 유신 신규(申珪) 등 72명은 이 두문동에서 끝까지 이성계의 조선을 인정하지 않다가 이성계에 의해 72명 모두 살해 당하고 말았답니다.
쉽게 말하면 정권이 바뀌자 공무원들이 파업을 한 것인데 맹사성은 애초에 파업에 참여를 안했었고, 황희는 파업에 참여했다가 복직을 한 것이고 72명은 파업하다가 죽임을 당한거죠.
누가 잘한건지는 모르겠네요.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아래 있는 사진은 제가 지난 글에 썼던 청풍 문화재 단지 부근에 있는 금월봉과 문화재 단지 안에 있는 한벽루, 응청각, 망월산성의 모습이랍니다. 금월봉의 모습은 마치 기암괴석으로 된 만물상의 모습.


이 자유로를 따라 임진각을 향해 가다보면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반구정이란 곳을 지나게 된답니다.
예전에 압구정에 대한 글을 쓰면서 반구정에 대해서 언급을 했었는데, 이 반구정(伴鷗亭)은 말그대로 갈매기를 동무 삼은 정자인데 조선초 유명한 정승인 황희(黃喜:1363∼1452)가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보낸 곳이랍니다.
원래 이름은 반구정이 아닌 낙하진(낙하나루) 근처에 있어서 낙하정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임진강 물결을 바라보면서 갈매기들의 천국이기에 후에 반구정이라고 하였다네요.
이 반구정 아래에서 보면 반구정의 왼쪽에 앙지대(仰止臺)라는 육각정이 있는데, 이 앙지대 자리가 원래 반구정 자리랍니다. 1915년 일제 때 반구정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그 자리에 앙지대라는 이름의 정자를 세운거죠. 이 앙지대로 6.25때 소실된 것을 1967년엔가 다시 세운 것이랍니다. 그래서인가 정자안에는 파주군수님들의 이름이 씌여진 편액들이 즐비하네요.
하여튼 이 두 개의 정자 아래에서 보면 앙지대는 육각정, 반구정은 사각정자, 그리고 앙지대가 반구정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앙지대를 반구정으로 착각하기 쉽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 반구정 옆에 있는 방촌 영당은 1452년 89세의 나이로 황희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유림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을 짓고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며 제사를 지내는 곳이랍니다.
황희선생과 관련된 정자가 또 하나있죠. 예전에 말씀 드렸었는데 광한루(광통루)가 바로 황희 선생이 태종때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여 파직, 서인(庶人)으로 되어 파주 교하를 거쳐 남원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지은 정자랍니다.
사실 조선초에 유명한 정승을 꼽으라면 아마 이 황희 선생과 맹사성을 들 수가 있거든요.
두 사람다 고려 말부터 벼슬길에 올라 역성혁명에 의한 조선 개국후에도 관직에 머물면서 정승을 지내신 분들인데 나이는 맹사성이 3살 많다네요.
그런데 맹사성과 달리 황희 선생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소재 광덕산에 있는 두문동이라는 곳에 은거 하였다가 태조 이성계와 친구들의 간청으로 벼슬길에 다시 오른 사람이랍니다.
하여간 황희 선생은 벼슬길에 오르면서 목숨을 건졌으나, 고려의 유신 신규(申珪) 등 72명은 이 두문동에서 끝까지 이성계의 조선을 인정하지 않다가 이성계에 의해 72명 모두 살해 당하고 말았답니다.
쉽게 말하면 정권이 바뀌자 공무원들이 파업을 한 것인데 맹사성은 애초에 파업에 참여를 안했었고, 황희는 파업에 참여했다가 복직을 한 것이고 72명은 파업하다가 죽임을 당한거죠.
누가 잘한건지는 모르겠네요.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아래 있는 사진은 제가 지난 글에 썼던 청풍 문화재 단지 부근에 있는 금월봉과 문화재 단지 안에 있는 한벽루, 응청각, 망월산성의 모습이랍니다. 금월봉의 모습은 마치 기암괴석으로 된 만물상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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