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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들의 모음

정이품송과 결혼한 소나무의 고향인 준경묘

정이품송 아시죠? 보은 속리산에 있는 것으로 지난 5월 8일에 결혼한 사실도 아시는지요? 소나무가 결혼하다니 좀 웃기는 이야기죠.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갈수록 볼품이 없어진(나이가 들어가니까요) 정이품송의 혈통 보존을 위해 문화재청과 충청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이 연구 끝에 다른 소나무와 결혼을 시키기로 하였던거죠.

원래는 정이품송의 씨앗을 채취 번식시키려 하였다가, 삼척시 준경릉이란 곳에 있는 소나무를 신부로 선택 자손을 번식시키기로 하였답니다. 신부로 간택(?)된 준경릉에 있는 소나무는 전국에서 1차로 엄선된 525그루의 소나무 중에서 선택된 것으로 수령이 95살, 높이 32m, 가슴둘레가 2m14㎝인데, 수형(樹型)과 건강이 전국 제일로 외모가 우아하다고 하던군요.(나
무가 본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보기에)

그리고 이렇게 교배된 종자들을 번식시켜 몇 년 후에는 속리산, 현충원, 독립기념관 등지에 이식할 모양입니다. 그러면 정이품송의 자손들이니 무슨 벼슬을 내려야 할런지......

오늘은 이 정이품송의 신부로 간택된 소나무가 있는 준경릉에 대해서 적어 볼까합니다. 준경릉(濬慶陵)은 준경묘라고 하기도 하는데, 릉이라고 부르니까 무슨 왕릉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왕릉은 아니고 후손들에 의해 릉으로 추존된 묘랍니다.

강원도 삼척시에서 죽서루를 지나는 오십천과 나란히 한 38번 국도를 따라 도계 방향(영동선 철도 상정역에서 신기역으로 가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만날 수 있는데, 행정구역은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준경릉을 속칭 활계릉이라고도 한다네요.

이 준경묘의 주인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 -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부친)로 왕위에 오른 적이 없으니 묘라고 하는 것이 맞겠죠? 하여튼 준경묘가 여기에 있게 된데는 많은 사연이 있다고 하더군요.

전주 이씨 시조로부터 3세인 천상(天祥)이라는 사람이 말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9년만에 천문, 지리에 통달하고 돌아와서는 완산(전주)에 있는 인지산 왕자봉 아래 선산을 모시고는 후손들에게 '우리 후손 중에 왕이 태어날 것이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묘(현재 전주 건지산에 있는 전주이씨 시조묘인 조경단)를 옮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네요.

그러다가 고려 명종 4년(1174년)에 전주이씨 16세손으로 '이린'이 전쟁에 나가 패하게 되자 조정에서 책임을 묻던 중 전주에 있던 묘가 문제가 되었는데, 지관들이 말하길 '인지산의 명당은 여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세라 왕의 자리가 분명하다'하여 명종이 이린과 그 가족들은 귀양보내 버렸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내 무덤을 파헤치게 하였으나 모두 벼락을 맞아 죽어 버리자, 왕이 말하길 하늘의 일이라고 탄식하며 그만두게 하였다는군요.

그후 이린의 아들인 이양무가 전주에서 살게 되고 그 아들인 이안사(목조)가 전주에서 관리가 되어 지내던중 전주 지주사(知州事)와 여자(이안사와 가까이 지내던 관기) 문제로 다툼이 있어 지금의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가 1년만인 1231년에 아버지인 이양무가 죽자 이곳에 묘를 잡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묘자리는 군왕의 땅이기에 백마리의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야하고 관은 금관으로 해야한다고 지관이 말을 하였으나(일설에는 이안사가 묘가 있는 자리에서 낮잠을 자던중 꿈에 스님이 나타나 말하였다고도 함), 돈이 없어 이안사(목조)가 흰소(白牛)로 백마리의 소를 대신하고 황금색 보리짚으로 금관을 대신하였다네요.
하여튼 이안사가 후에 다툼이 있었던 지주사가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하자 결국 함경도 덕원으로 피신을 하여 목조의 묘(덕릉)는 함경남도 경흥에 자리잡게 되었는데, 전주이씨 조경단을 비롯하여 준경묘, 덕릉 등이 풍수지리상으로 군왕의 땅이기에 이성계가 태어났다고 하는군요.
이 준경묘에서 10리 채 못되는 곳에는 이양무 부인의 묘인 영경묘(영경릉)가 있답니다.

이 준경묘 주변에는 황장목이라 불리우는 소나무들이 있어 경복궁 중건 때 치악산 입구에 있는 황장목들과 같이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기도 하였답니다. 치악산 구룡사 매표소 입구에는 황장목을 민간인이 손못대게 표시한 금표비가 남아 있답니다.

이러한 좋은 질을 가진 소나무들 중에서 신부를 선택했으니 힘에 겨워 나뭇가지마다 지지대를 받쳐 놓은 정이품송도 늙으막에 호강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