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갔다 온 남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아시죠?
준장 위에 소장, 소장 위에 중장, 중장 위에 대장, 그리고 대장 위에 병장이 있다고, 그냥 웃자고 하는 말들이지만 옛날 조선말에 위와 비슷한 내용의 승경가(昇卿歌, 벼슬의 순서를 읊은 노래)가 충청도 땅에서 유행했었던 모양입니다.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三相)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萬東廟)지기
만동묘지기란 말그대로 만동묘을 지키는 경비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어째서 이러한 묘지기가 임금 위에 있다고 표현이 되었는가? 궁금하시죠?
예전에 올린 30호 컬럼에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세운 사액서원이고 만동묘는 임진란 당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 준 명나라 임금인 신종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고 설명을 드렸었죠.
그런데 조선말 흥선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기 전에 화양동 계곡에 있는 이 만동묘에 갔었답니다. 그 당시에는 대원군이 되기 이전이라 왕족이긴 하지만 '운현궁의 봄'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남루한 모습으로 갔던 모양인데, 여기에서 흥선군은 큰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는군요.
남루한 차림의 흥선군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만동묘의 계단을 올라가자 '임금 위에 있던 만동묘지기'가 달려와 흥선군을 발로 걷어차서 계단 아래로 떨어 뜨렸다네요. 그러면서 하는 말 "만동묘는 대명황제를 모신 곳이다. 지금의 임금이 행차하여도 부액하지 못하거늘 누가 감히 황제폐하 앞에서 부액할 수 있는가" 라고.
참 웃기는 말이죠. 그 당시는 이미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한 청나라 마저 국운이 위태로운 세상이었었는데, 사대주의의 극치라고나 할까요.
하여튼 흥선군은 어처구니 없는 모욕에 화가 났음은 당연지사, 하지만 마음을 진정하고 하인을 시켜 만동묘의 사제인 변장의라는 사람에게 자신이 봉변당했음을 알리고 그 묘지기를 처벌해 달라고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변장의 라는 사람도 역시 대단한 사람, "묘지기의 행위가 좀 과한 듯 하지만 이번 일은 당연한 처사라 죄를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라는 답변을 하였답니다.
하여간 세월은 흘러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집정을 하게 되면서 흥선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원 철폐였답니다. 물론 전국에 있던 모든 서원들을 없앤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름있고 존속 가치가 있는 서원들은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없애 버렸죠. 거기에는 화양서원(사실 화양서원은 그 전부터 백성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아 왔었죠)과 이 만동묘도 포함이 되어서 말이죠. 그리고 만동묘의 사제인 변장의도 결국 흥선대원군에 의해 죽고 말았다네요.
하여튼 대원군의 서원철폐후 최익현을 비롯한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고, 대원군의 여론에 의해 일부 서원들은 부활시키기도 하였으나, 사액서원인 화양서원과 만동묘에 대해서는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 같아도 그렇게 했겠지만......
아마도 자신이 힘들었던 시절 당했던 봉변이 집권후 서원 철폐라는 정치적 보복과 개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네요.
준장 위에 소장, 소장 위에 중장, 중장 위에 대장, 그리고 대장 위에 병장이 있다고, 그냥 웃자고 하는 말들이지만 옛날 조선말에 위와 비슷한 내용의 승경가(昇卿歌, 벼슬의 순서를 읊은 노래)가 충청도 땅에서 유행했었던 모양입니다.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三相)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萬東廟)지기
만동묘지기란 말그대로 만동묘을 지키는 경비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어째서 이러한 묘지기가 임금 위에 있다고 표현이 되었는가? 궁금하시죠?
예전에 올린 30호 컬럼에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세운 사액서원이고 만동묘는 임진란 당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 준 명나라 임금인 신종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고 설명을 드렸었죠.
그런데 조선말 흥선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기 전에 화양동 계곡에 있는 이 만동묘에 갔었답니다. 그 당시에는 대원군이 되기 이전이라 왕족이긴 하지만 '운현궁의 봄'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남루한 모습으로 갔던 모양인데, 여기에서 흥선군은 큰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는군요.
남루한 차림의 흥선군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만동묘의 계단을 올라가자 '임금 위에 있던 만동묘지기'가 달려와 흥선군을 발로 걷어차서 계단 아래로 떨어 뜨렸다네요. 그러면서 하는 말 "만동묘는 대명황제를 모신 곳이다. 지금의 임금이 행차하여도 부액하지 못하거늘 누가 감히 황제폐하 앞에서 부액할 수 있는가" 라고.
참 웃기는 말이죠. 그 당시는 이미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한 청나라 마저 국운이 위태로운 세상이었었는데, 사대주의의 극치라고나 할까요.
하여튼 흥선군은 어처구니 없는 모욕에 화가 났음은 당연지사, 하지만 마음을 진정하고 하인을 시켜 만동묘의 사제인 변장의라는 사람에게 자신이 봉변당했음을 알리고 그 묘지기를 처벌해 달라고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변장의 라는 사람도 역시 대단한 사람, "묘지기의 행위가 좀 과한 듯 하지만 이번 일은 당연한 처사라 죄를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라는 답변을 하였답니다.
하여간 세월은 흘러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집정을 하게 되면서 흥선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원 철폐였답니다. 물론 전국에 있던 모든 서원들을 없앤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름있고 존속 가치가 있는 서원들은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없애 버렸죠. 거기에는 화양서원(사실 화양서원은 그 전부터 백성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아 왔었죠)과 이 만동묘도 포함이 되어서 말이죠. 그리고 만동묘의 사제인 변장의도 결국 흥선대원군에 의해 죽고 말았다네요.
하여튼 대원군의 서원철폐후 최익현을 비롯한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고, 대원군의 여론에 의해 일부 서원들은 부활시키기도 하였으나, 사액서원인 화양서원과 만동묘에 대해서는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 같아도 그렇게 했겠지만......
아마도 자신이 힘들었던 시절 당했던 봉변이 집권후 서원 철폐라는 정치적 보복과 개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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