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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들의 모음

임진란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구원군인가?

속리산 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죠. 법주사, 문장대, 정이품송 등등......
저도 속리산을 몇 번 가보기는 했지만 문장대는 10년 전에 올라 가보고 요즘은 산 아래에서 헤매다가 돌아오곤 합니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주로 법주사와 정이품송을 보곤 속리산을 갔다 왔다고들 하더군요.

오늘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있는 "俗離實記碑"에 대해서 말씀드릴까하네요.
속리실기비는 법주사 방향과 문장대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갈라지는 삼거리 좌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송시열 선생이 글을 짓고 송준길 선생이 글을 쓴 것으로 속리산에 관한 몇가지 사실을 적은 비석이거든요.

그런데 여기 비문에 약소국의 비애를 느낄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답니다. 뭐냐하면 수정봉의 거북바위에 대한 이야기로 저도 올라가 보지는 못했지만 수정봉 정상에는 거북바위라는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이 거북바위의 머리가 예전에 서쪽을 향해 고개을 쳐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네요.

비문에는 중원인이라고 되어있는데, 당시 명나라의 풍수학자가 와서 보니 명나라의 재물과 기운이 모두 조선으로 흘러 들어올 지세이고, 또 감히 조선의 거북바위가 서쪽(명나라)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반항하는 기세라 하여 임진란당시 명나라의 장수인 이여송의 명에 의해 거북바위의 거북머리가 잘려지고 거북의 등에는 10층석탑을 세워 거북바위을 지세를 꺽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이러다가 명나라가 수정봉 거북바위의 효험이 있었던지 명나라가 망해 버리고 나자, 효종때 옥천군수 등 관리들이 잘려나간 거북의 머리를 다시 붙이고 등위에서 거북을 누루고 있던 10층석탑도 헐어 버리는 등 주체성을 발휘하기도 했었답니다. 물론 지금은 거북바위의 거북 머리는 없다고 하네요.

이 수정봉은 법주사 경내에 있는 수정암의 뒷산봉우리인데 그곳에 가보자 하고 수정암의 노스님께 가는 길을 물었더니, 스님 말씀하시길 예전에 수정봉은 간첩들이 많이 나오던 곳이라 길도 없고 안가는게 좋다고 하더군요.

일본이 예전에 임진란 전에 비밀리에 밀정을 보내서 조선의 정기를 꺽기 위해 곳곳에 말뚝을 박는 등하고 일제 때에도 이런 짓들을 많이 하였었죠. 하지만 임진란 당시 이여송도 이와 같은 짓을 많이 하였답니다.

이 수정봉의 거북바위 뿐만 아니라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읍 매포리에 5번국도와 중앙선 철도를 안고 돌아가는 단봉산 또는 기러기봉이라 부르는 기러기가 날개치면서 날아가는 형상의 산이 있는데, 이 단봉산 아래 기러기의 날개 부위에 해당하는 곳에 이여송은 작살을 박아 넣고 작살의 자루는 없애 버리도록 하기도 하였다는군요.
만약 이 마을에서 누군가가 작살을 뽑기만 하면 명나라를 위태롭게 할 큰 인물이 날 것이라고 하였다는데, 작살이 어디 꽂혔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군요. 대신에 작살고개라는 명칭만 남아 있답니다.
이뿐만 아니라 안동, 청송까지 내려 가며서 이와 같은 짓을 많이 했다는군요. 우리나라가 불쌍한건지 이여송이 불쌍한건지......

이여송은 지금으로 치면 조선족 2세라고 할 수 있죠. 아버지가 명나라로 건너가 관리가 되었으니, 그런 사람이 고향인 조선에 구원군이란 미명하에 군사를 이끌고 오면서 아버지 나라의 기운을 꺽고 있었으니......

하긴 임진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도 조선을 돕기 위한 것 보다는 자신들의 영토를 보전하려는 속셈이 컷다고 볼 수 있죠. 당시 막부 정권의 일본은 조선에게 명나라을 정벌하기 위한 길을 비켜 달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전쟁을 시작했거든요. 그러니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조선을 정벌하고 나면 명나라 영토를 넘보는 것은 뻔한 사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낼 수 밖에요.
나중에 선조가 조선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려하자 조선의 임금이 명나라로 들어오면 전쟁이 명나라의 영토까지 전장화 된다고 하여 극구 반대했던 일 등......
싸움을 하려거든 조선 땅에서 해라 우리 땅까진 올 필요는 없다였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