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마루에 흐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었든......"
아마도 80년대 대학 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이 되어집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2집인가에도 실려 있는 곡인데, 왜 이런 노래를 자주 부르고 들었던가는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이고, 전 단지 이 곡에 나오는 "우금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네요.
"우금치(于金峙)"란 제2차 동학농민군 전투의 최대 접전지로서 1894년 11월 8일 동학의 남도 접주인 전봉준이 이끄는 3만의 농민군이 2500여명의 관군(일본군을 포함) 에게 무참히 패배한 장소랍니다.
이 우금치는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40번 국도상에 위치하는데, 행정구역상으론 공주시 금학동에 소재하고 있는 별로 높지도 않은 고개랍니다. 공주에서 부여로 가다보면 이 우금치 마루 우측에 1973년에 세워진 위령탑이 있긴 하지만 사실 별로 단장이 되어있지 않아서인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죠. 쉴곳도 없고.
그러나 당시 동학군에 있어서 이 고개는 충청도 감영(현재의 도청)이 소재한 공주를 점령하게 되면 중부권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기에 농민혁명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전투였었는데, 결국 40여차례나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농민군은 거의 전멸하고 그 피가 주변의 논과 도랑들을 가득 물들였다는데......
하여튼 이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패한후, 이듬해 3월 전봉준이 처형됨으로써 동학 농민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보통 고개(또는 재, 티)를 현(峴), 령(嶺), 치(峙)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대체로 고개가 높거나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면 "현", "령"으로 표기하고, 그 밖에 낮은 고개 등은 "치"라는 말을 붙여서 표기한다고 하네요.
아마도 80년대 대학 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이 되어집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2집인가에도 실려 있는 곡인데, 왜 이런 노래를 자주 부르고 들었던가는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이고, 전 단지 이 곡에 나오는 "우금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네요.
"우금치(于金峙)"란 제2차 동학농민군 전투의 최대 접전지로서 1894년 11월 8일 동학의 남도 접주인 전봉준이 이끄는 3만의 농민군이 2500여명의 관군(일본군을 포함) 에게 무참히 패배한 장소랍니다.
이 우금치는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40번 국도상에 위치하는데, 행정구역상으론 공주시 금학동에 소재하고 있는 별로 높지도 않은 고개랍니다. 공주에서 부여로 가다보면 이 우금치 마루 우측에 1973년에 세워진 위령탑이 있긴 하지만 사실 별로 단장이 되어있지 않아서인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죠. 쉴곳도 없고.
그러나 당시 동학군에 있어서 이 고개는 충청도 감영(현재의 도청)이 소재한 공주를 점령하게 되면 중부권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기에 농민혁명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전투였었는데, 결국 40여차례나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농민군은 거의 전멸하고 그 피가 주변의 논과 도랑들을 가득 물들였다는데......
하여튼 이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패한후, 이듬해 3월 전봉준이 처형됨으로써 동학 농민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보통 고개(또는 재, 티)를 현(峴), 령(嶺), 치(峙)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대체로 고개가 높거나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면 "현", "령"으로 표기하고, 그 밖에 낮은 고개 등은 "치"라는 말을 붙여서 표기한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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